[트로트 르네상스]<68>강(江)의 노래(2)
2025-09-03
보름달은 시공간을 아우르며 남녀의 정념(情念)마저 하나로 엮게 하는 신비한 마력을 지녔다.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가 물레방앗간에서 하나가 된 것도, 나도향의 ‘물레방아’에서 오십 중반의 신치규가 스물 두 살의 젊은 아낙을 유혹할 수 있었던 것도 만월(滿月)의 숨소리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 기막힌 밤의 정취는 대중가요에서도 되살아났다.
‘하룻밤 풋사랑에 이 밤을 새우고, 사랑에 못이 박혀 흐르는 눈물, 손수건 적시며 미련만 남기고, 말 없이 헤어지던 아~ 하룻밤 풋사랑’.
‘낯설은 타향땅에 그날 밤 그 처녀가, 웬일인지 나를 나를 못 잊게 하네, 기타줄에 실은 사랑 뜨내기 사랑, 울어라 추억의 나의 기타여’.
손인호의 ‘하룻밤 풋사랑’과 ‘울어라 기타줄’의 노랫말 행간을 지배하는 것은 보름달의 ‘인력(引力)’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낯설은 타향땅에서 이루어진 하룻밤 순정을 설명할 수가 없다. 또 그것이 한평생 잊을 수 없는 연정으로 남아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보름달의 아우라만이 이끌어낼 수 있는 ‘월야유정(月夜有情)’이다. 조지훈은 ‘여운’(餘韻)이라는 시에서 달빛에 젖은 탑(塔)을 관능적인 여인의 몸에 비유했지만, 그것은 육감적이기 보다는 심미적 황홀경으로 내밀한 가치에 다가선 것이다.
나도향은 ‘그믐달’에 주목했다. 보름달이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이라면, 그믐달은 연인을 잃고 쫓겨난 공주와 같다고 했다. 새벽녘에 뜨는 그믐달은 보는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 ‘객창한등(客窓寒燈)’에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외로운 사람이나 봐주는 쓰라린 가슴의 가련한 달이라는 것이다.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스러져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한 맛이 있다고 했다.
달을 여성으로 의인화한 나도향의 ‘그믐달’에서는 애절함과 한스러움이 흠뻑 배어있다. 그믐달이 주는 정감을 인상적으로 표현한 예술적 경지에 이른 산문이다. 이같은 그믐달의 정서 역시 대중가요의 노랫말에서도 스치듯 비친다. 일제강점기 망국과 실연의 비가(悲歌)였던 고복수의 ‘짝사랑’ 1절 가사에서 드러난 ‘여울에 아롱 젖은 이즈러진 조각달’이 그 유사한 사례일 것이다.
손인호의 ‘하룻밤 풋사랑’에서도 보름달의 마력에 이끌려 순정을 나누었지만, 말없이 헤어지고 난 다음 사랑에 못이 박힌 가슴을 아파하며 외로운 객창을 열고 쳐다보던 달은 그믐달이었을 것이다. 6·25전쟁기 1·4후퇴 실향민과 피란민의 비애를 담은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의 2절 가사에서 ‘영도다리 난간 위에 외로이 뜬 초생달’도 상실과 그리움의 정서에서 그믐달과 다를 게 없다.
조선 중기의 문인 송익필은 ‘망월’(望月)이라는 한시에서 ‘둥글기 전에는 느린 게 한이었더니, 둥글고 나서는 어찌 이리도 쉽게 이지러지는고, 삼십 밤 중 둥근 날은 하룻밤, 백년의 심사가 모두 이와같은 것을...’ 이라고 읊었다.
그렇다. 달은 보름달로 차오르든 그믐달로 기울어지든 모든 것을 비추며, 자연과 사람은 그 달빛에 젖기 마련이다. 그 심미적 정서적 반응이 가요에도 반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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