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성의 자연에세이] <36>가을의 전령사
2025-08-18
온대지역의 나무는 크게 낙엽수(落葉樹)로도 불리는 갈잎나무와 상록수(常綠樹)로도 불리는 늘푸른나무로 나뉜다. 갈잎나무는 겨울에 잎이 떨어져서 봄에 새잎이 나는 나무를, 늘푸른나무는 일 년 내내 잎이 푸른 나무를 가리킨다.
상록수 하면 언뜻 떠오르는 것이 ‘상록수’라는 심훈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남자 주인공 박동혁이 출감하여 동지이자 연인인 여자 주인공 채영신의 무덤에서 그녀의 뜻을 이어 평생 농민을 위해 살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농촌운동을 벌이던 고향 한곡리로 돌아오는데 농민회관 앞에 심었던 전나무, 소나무, 향나무 등의 상록수들이 푸른 모습으로 그를 맞이하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이는 박동혁이 상록수처럼 변함없이 농촌운동을 계속할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이처럼 상록수 또는 늘푸른나무는 언제나 한결같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온대지역 나무들의 대부분은 상록수가 아니라 낙엽수다. 낙엽수는 온대지역의 풍광을 매우 다채롭게 만든다. 낙엽수는 대체로 봄이나 여름에 화사한 꽃을 피운다. 그리고 그 잎은 봄에는 연초록으로 풋풋하고, 여름에서 한가을까지는 진초록으로 활력이 넘치고, 늦가을에는 오색으로 화려하게 변색했다가 시들어 가랑잎으로 진다.
이로인해 낙엽수는 겨울에 ‘낙목한천(落木寒天)’의 풍광을 연출한다. 낙엽수는 이처럼 잎이 철에 따라 바뀌고 겨울에 졌다가 봄에 다시 나기에 풍광에 다양한 변화를 낳는다. 그리고 그 잎들이 매년 졌다가 새봄에 다시 피어남으로써 세대 변화 또는 채움을 위한 공허를 상징하기도 한다. 상록수가 불변을 상징한다면, 낙엽수는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낙엽수가 가을에 잎을 조락시켰다가 이듬해 봄에 새잎을 내는 것은 나름의 월동대책이다. 겨울의 추위에 나무가 얼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가을에 미리 잎에 수분을 공급하지 않아 잎이 마르면서 단풍이 들었다가 결국 낙엽으로 진다. 낙엽수는 겨울이 오기 전에 잎을 떨구어 광합성을 중단하고 일종의 겨울잠을 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낙엽수가 겨울 동안 아무 것도 않는 것은 아니다. 겨울 동안 낙엽수는 봄에 있을 소생을 준비한다. 즉 낙엽수는 추위 속에서 새로운 잎이 될 잎눈과 꽃으로 피어날 꽃눈을 분화시켜 이듬해 봄이 되면 새로운 잎과 꽃을 피워 화려하게 부활하는 것이다.
이처럼 온대지역의 낙엽수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대체로 잎을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로 남는다. 이는 낙엽수들이 월동 준비를 마친 것을 뜻한다. 이때부터 마른 잎이 잘 떨어지지 않는 참나무, 양버즘나무, 버드나무 등을 비롯한 몇몇 나무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낙엽수들은 잎 하나 없이 헐벗고 쓸쓸한 채로 차가운 날씨와 온갖 풍상을 견디는 인고의 세월을 겪게 된다. 이제 나목들은 새봄이 올 때까지 오롯이 알몸으로 북풍한설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가을 들판이 다 비었다./바람만 찬란히 올 것이다.”[이성선, 〈입동 이후〉 중에서].
이처럼 늦가을은 그야말로 잎은 떨어지고 대기는 차디찬 낙목한천의 풍광이 전개되는 시점이다. 이러한 풍광은 대체로 11월 하순 경부터 나타난다. 이때부터 낙목한천이 전개됨에 따라 그때까지 잎들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훤히 드러나게 된다. 숲도 가로도 잎 진 나무들의 도열로 휑하기만 하다. 그러면서 가지에 달린 무수한 잎들로 보이지 않던 숲속의 이러저러한 풍경도 보이고, 가로수에 막혀 있던 가로수 밖의 세상도 보이게 된다.
“갑자기 산봉우리가 치솟기에
창을 열고 고개를 든다.
깎아지른 돌벼랑이사 사철 한 모양
구름도 한 오리 없는 낙목한천(落木寒天)을
무어라 한나절 넋을 잃노.”[조지훈, 〈추일단장(秋日斷腸)〉 중에서].
숲이나 도로에는 쌓인 낙엽들이 찬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모습도 그 전의 숲이나 도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그 세상은 지금껏 우리가 보아왔던 세상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낙목한천의 텅 빈 세상은 나뭇잎으로 무성하던 세상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려한 의상을 걸친 모습과 전라(全裸)의 모습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푸른 잎사귀들로 가려진 세상과 그 잎사귀들이 전부 사라지고 훤히 드러난 세상이 너무도 다르다. 나무의 모습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 너머의 세상도 달라진다. 왜냐면, 나뭇잎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들도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나무들은 잎을 떨구고 나목이 됨으로써 우리에게 텅 빈 별개의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낙목한천이 보여주는 것은 텅 빈 공허한 세상이지만 우리는 그 공허가 새봄에 다시 메워진다는 것을 안다. 이듬해 나무에 새 잎이 돋으면 세상은 다시 충만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 세상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가면 후세들이 이 세상을 다시 채울 것이다.
월터 페이터의 산문은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빌어 다음과 같은 호메로스의 시를 인용하고 있다.
“인간은 나뭇잎과 흡사한 것,
가을바람이 낙엽을 휘몰아 가면,
봄은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나무는 헐벗었기에 새봄에 새잎으로 부활할 수 있다. 비웠기에 다시 채울 수 있는 것이다. 늦가을부터 전개되는 낙목한천의 공허는 이듬해 봄이 되어 새잎이 나면 다시 충만으로 바뀌게 된다. 나뭇잎이 없는 공허한 세상은 실은 새봄의 새로 나온 잎들로 채워져 새 세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니 공허는 새로운 충만을 위한 예비과정이기도 한 셈이다. 그 공허함 속에서 새로운 채워짐, 새로운 삶이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낙목한천은 채우기 위해서는 비워야 함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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