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성의 자연에세이] <32> 열매와 동물의 상생
2025-06-16

따라서 그만큼 해의 고도와 열기도 낮아진다. 아침과 저녁에는 선선한 바람도 분다. 절기로는 ‘가을에 들어선다’는 입추(8월7~22일)도 절반이 지나가는 시점이다. 한낮에 가만히 있어도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등에 땀이 줄줄 흐르는 일은 더 이상 없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가슬가슬한 바람이 전신을 휘감기도 한다. 또 일교차가 커져 열대야도 사라지고 새벽녘에는 풀잎에 이슬이 맺히기도 한다.
이 시점에서는 달력 상 가을로 치는 9월까지 약 보름밖에 남지 않은 때다. 따라서 이 시기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이행기 또는 여름과 가을이 교차하는 교절기라 할 수 있다. 여름이면서 가을의 기운이 느껴지는 시점인 셈이다. 아직은 늦더위가 만만찮은 여름이지만 가을의 징조가 나타나는 때인 것이다. 다가오는 계절의 징조 또는 전조(前兆)를 우리는 흔히 ‘계절의 전령사(傳令使)’라고 부른다. 이제 가을의 전령사들을 감지하며 늦더위를 달래보자.
입추 무렵부터 조석의 서늘한 바람이나 한낮의 건조하고 선선한 바람도 촉각으로 느끼는 가을의 전령사라 할 수 있다.
한 시인의 표현처럼, “가을을 준비하는 바람은/서늘한 기운 뽐내며 지나간다.”[장화순, 〈늦여름〉 중에서].
이처럼 계절의 변화는 흔히 바람에 의해 우리의 촉각에 가장 먼저 포착된다. 그래서 겨울에서 봄에로의 이행기에는 갑작스런 훈풍으로 봄을 예견하듯, 여름에서 가을에로의 이행기에는 조석의 서늘한 바람이나 한낮의 느닷없는 선선한 바람으로 가을이 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계절의 전령사는 촉각보다는 청각이나 시각에 포착되는 것들이 더 많다.
이즈음 청각에 포착되는 가장 뚜렷한 가을의 전령사는 시끄러운 매미 소리와 희미한 풀벌레들의 소리다.
“미루나무 가지에 우는 매미/억새풀에 앉은 여치/시도 때도 없이 여름이 아쉬워/목청 높이 울어 댄다.”[강봉환, 〈여름 끝자락에서〉 중에서].
특히 풀벌레들은 주로 한여름에 나타나 풀밭에서 수컷이 암컷을 부르기 위해 좌우 날개들을 부딪치거나 날개와 뒷다리를 부딪쳐 마찰음을 내기에 그 소리가 가냘프게 들린다. 그 가운데 귀뚜라미 소리는 특히 더 가냘프고 처량하다. 귀뚜라미 소리는 대체로 8월부터 들리기 시작하는데 흔히 풀밭에서보다는 섬돌 밑이나 담벼락 사이에서도 더 자주 들려오기에 인간의 귀에 잘 포착된다.
게다가 가을이 가까워 공기가 건조해질수록 더욱더 처량하게 들린다. 나희덕 시인은 귀뚜라미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라고 회의하지만, 사실 귀뚜라미 소리만큼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가을을 예견하게 하는 소리도 없을 것이다.
시각에 포착되는 가을의 전령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빨갛게 익은 고추라고 할 수 있다. 고추는 늦여름부터 익는데 익을수록 새빨갛게 된다. 시골에서는 흔히 태양초를 만들기 위해 빨갛게 익은 고추들을 길가나 마당의 멍석 위에 널어 말리는데 이것이 눈에 잘 띄어 사람들에게 가을의 전령사로 확실하게 감지된다고 할 수 있다.
아직 녹색이 지배적인 시절에 무더기로 널린 고추들의 새빨간 빛은 매우 강렬한 인상으로 가을의 내도를 느끼게 한다. 시각적 가을의 전령사로 잠자리도 빼놓을 수 없다. 늦여름에, 좀잠자리는 떼로 공중을 나는 모습으로, 고추잠자리는 그 붉은색으로, 시절을 알린다. 고추잠자리의 수컷은 미성숙한 때는 주황색을 띠다가 성숙해지면 날개를 제외하고 몸 전체가 빨갛게 혼인색을 띤다.
그런 수컷이 자신의 영역을 순찰하며 마른 풀 줄기나 땅에 꽂힌 막대기 등의 끝에 앉아 있으면 비록 한 마리지만 그 붉은색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잘 띈다. 붉은 고추잠자리는 외로운 가을의 전령사다. 배롱나무, 무궁화, 능소화는 한여름부터 조금씩 꽃이 피다가 늦여름에 무더기로 피어나기에 그 모습들 또한 가을의 전조가 된다. 이들 꽃들은 한 송이가 오래 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운 송이들이 피고 지고를 반복한다.
특히 배롱나무는 주름진 많은 꽃들이 밖으로 들어난 가지들의 끝에 원추꽃차례로 모여 피기에 잎에 가려지지 않고 잘 보인다. 배롱나무는 정원수로 많이 심기에 홍자색 꽃이 가득 핀 배롱나무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가을의 전령사다. 해바라기는 8~9월에 줄기 끝과 줄기 위쪽 가지 끝에 지름 8~60cm의 둥글고 큰 두상화(頭狀花)를 피워 가을을 예고한다.
이와 함께 바람에 한들거리는 길가의 코스모스도 그리고 들국화로 통칭되는 개미취, 벌개미취, 쑥부쟁이, 금불초, 과꽃 등의 국화과의 청초한 꽃들도 늦여름에 무더기로 피어 가을맞이를 준비한다. 계절은 1년을 단위로 순환하기에 시간이 되면 새로운 계절이 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추위 속에서 따뜻한 봄을 기다리듯, 무더위 속에서 시원한 가을을 기다린다. 그런 이들에게 가을의 전령사는 반갑기 그지없는 존재들이다.
이들의 존재로 이제 무더운 여름도 끝나가고 시원한 가을이 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가을아, 어서 오라! 무더위에 지친 우리의 심신이 기꺼운 마음으로 너를 반겨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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