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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성의 자연에세이] <38> 원숙의 시절

따가운 햇볕으로 열매들 농익을 때
미물들 때맞추어 성숙한 모습 되니
9월은 원숙의 계절 모든 것이 익는다
한양경제 2025-09-18 10:27:39
9월 중순에 노랗게 익어가고 있는 벼. 이효성

일반적으로 온대지역에서 식물은 봄에 날씨가 따뜻해 땅이 풀릴 때 소생해, 여름에 작열하는 햇빛과 풍부한 수분을 이용해 자라고, 가을에 따가운 햇살과 선선한 바람을 이용해 열매와 씨앗을 익힌다. 따라서 봄이 소생의 계절이고, 여름이 성숙의 계절이라면, 가을 특히 9월은 원숙의 계절이다. 봄과 여름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키운다면, 가을에는 그 열매를 익히거나 여물게 하는 것이다. 9월은 주요 곡식과 과일이 익는 때다.

그리고 곡식과 과일이 익으면 거두어야 한다. 그래서 가을은 흔히 추수의 계절이기도 하다. 물론, 모두 다 가을에 수확하는 것은 아니다. 보리, 밀, 완두 그리고 버찌, 매실, 자두 등 일부 곡식과 과일은 6월에 수확하는 것들도 있다. 또 옥수수나 복숭아처럼 8월에 수확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주식인 벼를 비롯해 수수, 조, 기장, 콩 등과 같은 곡식 그리고 우리가 주로 먹는 과일인 포도, 사과, 배, 감, 대추 등의 수확은 대체로 9~10월에 이루어진다. 그런데 곡식과 과일의 수확은 그들의 일생이 종말을 맞는 것이다. 그래서 익는다는 것은 곧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곡식과 과일은 거두기 전에 먼저 잘 익어야 한다. 익는다는 것은 곡식이든 과일이든 그 씨앗이 여무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과일의 경우는 씨앗을 먹는 것이 아니라 과육을 먹기에 씨앗이 익으면 과육은 단맛을 더하고 그 빛깔도 초록에서 눈에 잘 띄는 노란색이나 붉은색이나 검은색 등으로 바뀌는데 이것을 과일이 익는다고 말한다.

이들 가을 곡식과 과일이 익는 기간은 대체로 초가을 즉 9월 어간이다. 그래서 곡식과 과일의 원숙을 위해서는 9월의 날씨가 매우 중요하다. 9월이 되면 무더위는 가신다. 그와 함께 조석으로는 기온이 서늘하고, 낮에도 선선하고 건조한 바람이 분다. 그렇다고 더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9월에도 만만치 않은 늦더위가 있다. 무덥지는 않지만 한낮에는 햇볕이 상당히 따갑다. 곡식과 과일은 이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과 따가운 햇볕 속에서 무르익어간다.  

곡식이나 과일이나 제대로 익기 위해서는 선선한 바람과 따가운 햇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 시인 릴케는 ‘가을날’이란 시에서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마지막 과실에게 결실을 명하십시오./열매 위에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주시고”라고 말했을 것이다. 

초가을인 9월에도 한낮의 햇볕은 여름 못지않게 따갑다. 구월의 햇볕이 한여름 같은 불볕은 아니지만 여전히 강렬하다. 9월 한낮의 그 강렬한 햇볕은 곡식과 과일들에게는 하나의 축복이다. 9월의 따가운 햇살은 결실을 위한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과일들이 익고 곡식들이 제대로 여물 수 있다. 가을의 따가운 햇살과 선선한 바람에 곡식과 과일 뿐만 아니라 곤충들을 비롯한 미물들도 원숙해진다. 가을까지 생의 한 순환을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한 시인의 지적처럼, 어쩌면 그 햇살은 오곡백과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을 햇살은/모든 것들을 익어가게 한다/그 품안에 들면 산이며 들/강물이며 하다못해 곡식이며 과일/곤충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까지/익어가지 않고서는 배겨나지를 못한다”[나태주, 〈악수〉 중에서]. 

온대지역에서 계절 가운데 9월을 비롯해 가을이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커다란 축복이다. 사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가운데 어느 하나 축복이 아닌 계절이 있겠는가? 봄은 소생을 가능하게 하고, 여름은 성장을 가능하게 하고, 가을은 원숙을 가능하게 한다. 심지어 시련과 죽음의 계절이라는 겨울조차도 소생과 부활을 예비하게 하는 계절이다.

인간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계절은 없다. 사시사철이 다 필수적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을이 없다면 추운 겨울에 굶주려야 하기에 작물을 수확해 겨울을 굶주림 없이 날 수 있게 하는 가을이야말로 참으로 고마운 계절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가을은 특별히 더 소중하다. 무엇보다 오곡백과를 완숙시켜 수확을 할 수 있게 하는 철이기 때문이다. 그 덕에 소생의 봄을 기다리며 농작물의 재배가 불가능하고 자연에서 먹을 것을 구하기도 어려운 겨울을 굶주리지 않고 무사히 날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은 가을 특유의 정조(情操)로 말미암아 까닭모를 비애와 우수에 빠지고, 한가을 수확으로 종말을 맞는 오곡백과의 원숙을 보면서, 자신과 자신의 삶과 인생 그 자체에 대해서 사색과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도 가을, 특히 9월이 있어 정신적으로 보다 더 원숙해지는 것이 아닐까!

이효성 한양경제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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