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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성의 자연에세이]<19> 낙목한천의 시절

십이월 동지 있어 낮들이 짧은데다
설한풍 불어와서 혹한이 시작되니
나무들 잎을 떨구고 나목으로 견디네
한양경제 2024-12-02 16:30:34
낙목한천의 겨울 풍경. 11월 28일, 개포동에서. 이효성

그레고리력에서는 12월부터 겨울로 친다. 12월은 겨울이 시작되는 달인 것이다. 이는 12월부터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11월부터는 삭풍이 불어오고 수은주도 상당히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체로 영상을 유지하기 때문에 매섭게 추운 때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약간의 두꺼운 옷으로 견딜 만하다. 그러나 12월에 들어서면 삭풍도 한결 더 차고, 더 강하게 불고, 기온도 더 떨어져 영하로 되는 경우가 많아 제대로 된 겨울옷을 걸쳐야 한다. 그리고 영하의 날씨가 지배하기 때문에 눈도 내리고 얼음도 얼게 된다.

겨울의 대표하는 상징물을 눈으로 친다면 북한과 강원도 지역을 제외한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제대로 된 눈은 12월에나 오기 때문에 12월이 되어야 확실한 겨울이라 할 수 있다. 11월 하순에 ‘소설(小雪)’ 절기가 있고 어쩌다 큰 눈이 오기도 하지만 소설 기간에는 대체로 눈인지 비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진눈깨비가 오거나 아니면 오자마자 녹아버리고 쌓이지는 않는 정말 약간의 눈이 내린다. 대체로 12월이 되어야, ‘대설(大雪)’ 절기가 있기도 하지만, 비로소 내려서 상당히 쌓이는 눈다운 눈이 온다. 내리는 눈은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거나 그리움을 자아내고, 소복이 쌓인 눈은 푸근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매우 감성적인 물상이어서 거개의 사람들은 눈을 반기는데, 반길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내리는 눈은 대체로 12월에나 온다.

그러나 눈만이 겨울의 상징은 아니다. 눈 못지않게 얼음 또한 겨울을 상징하는 중요한 물상이라 할 수 있다. 첫얼음은 대체로 11월 하순 경에 발표되지만 우리가 우리 주위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본격적인 얼음은 대체로 12월이 되어야 볼 수 있다. 눈이나 얼음이나 같은 물이 변하여 된 것이지만 그 모양이나 성질이나 사람의 정서적 반응이 사뭇 다르다. 얼음은 대체로 사람에게 눈과 같은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대신 얼음은 그 차고 단단함으로 사람들에게 실용적인 재료가 되고, 햇빛이 비칠 때 그 영롱함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이런 단단한 얼음은 대체로 12월 하순 이후에나 가능하다.

12월이 되면 본격적인 추위로 인하여 모든 낙엽수는 잎을 떨구고 온전히 나목으로 북풍한설을 견딘다. 얼지 않기 위해 수액의 운반도 최소한으로 그친다. 이는 추위를 이겨내려는 나무 나름의 월동대책이다. 그러면서도 다가올 새봄의 화려한 소생을 위하여 잎눈과 꽃눈을 분화시킨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한겨울에도 가지에서는 잎눈과 꽃눈이 형성되어 아주 조금씩 자라고 있다. 그처럼 겨울 동안 봄의 소생을 준비하였기에 나목은 봄이 되면 새로운 잎과 꽃을 피워 화려하게 소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겨울나무의 그런 모습을 보고 추운 겨울을 견디면 꽃 피는 따뜻한 봄을 맞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는 12월 21일이나 22일에 온다. 이날 낮보다 밤이 무려 5시간 가까이 더 길다. 따라서 동짓날 전후인 12월과 1월이 밤이 아주 긴 편이다. 음력에서는 동지가 있는 달을 동짓달이라 하고 그 다음 달을 섣달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동지섣달 긴긴 밤”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밤이 길다는 것은 그만큼 낮이 짧다는 뜻이기에 태양의 복사열도 적다. 낮이 가장 짧은 날은 동짓날이지만 기온이 낮은 관계로 대지가 점점 더 식기 때문에 동지 이후에 낮이 조금씩 길어진다 하더라도 기온은 점점 더 내려가서 더 추워지게 된다. 12월 하순부터 2월 초까지가 가장 추운 이유다.

동짓날까지 낮은 점점 더 짧아지고 밤은 점점 더 길어지기에 만일 동지 이후에도 그런 변화가 계속되면 세상은 점점 더 추워지고 결국 낮은 없고 캄캄한 밤만 있게 될 것이다. 이는 상상만 해도 두렵기 짝이 없는 끔찍한 일이다. 다행히, 동지점을 기점으로 태양이 되돌아오기에 또는 높아지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낮이 점점 짧아지다 다시 길어지는 시점 또는 태양이 자꾸 낮아지다가 다시 높아지는 시점, 즉 태양이 되돌아오는 시점을 중시하고 크게 기념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의 주나라에서는 동짓날을 설날로 삼았다.

그런데 천문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 서양에서는 실제 동짓날은 12월 21일이나 22일임에도 대개 12월 25일쯤에 태양이 다시 높아지는 사실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고대 로마 제국에서는 12월 25일이 태양의 복원 또는 ‘불멸의 태양(Sol Invictus)’을 기리는 동지제(冬至祭) 즉 동지축제일이었다. 그런데 기독교가 서양을 지배하면서 동지축제일은 예수탄생축일 즉 크리스마스로 대체되었다.


이효성 전 성균관대 언론학과 교수·전 방송통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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