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성의 자연에세이] <30> 청순하고 싱그러운 신록의 세상
2025-05-15

아시아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주식은 쌀이고 그래서 가장 중요한 작물은 벼다.
한국인들은 특히 옛적부터 쌀을 주식으로 해왔고 따라서 벼농사는 농사의 중심이었다. 그 역사 또한 길다. 1998년 충청북도 청주시 옥산면 소로리에서 발굴된 탄화된 순화 벼 127톨은 방사성 연대 측정에 의해 1만5천년 된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벼농사의 기원이 12,000년 전의 중국이라는 종래의 주장을 뒤집는 것이다. 이 결과에 의하면, 벼농사는 한반도에서 기원하여 중국을 거쳐 동남아 및 인도로 퍼져나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우리의 주식은 쌀이라서 평야 지대의 우리 농촌은 주로 벼농사를 짓는다. 그런데 벼는 자라는 동안 더운 날씨와 물을 좋아해 이 기간 동안 강수량이 풍부해야 한다. 다행히 한국의 여름은 몬순 기후여서 장마철이 있는 등 강수량이 매우 풍부하다. 모내기는 5월 중순경부터 북쪽에서 남쪽으로 점점 내려오는데 늦어도 하지까지는 마쳐야 한다.
모내기한 어린 벼는 키의 반쯤이 물에 잠겨야 하고 벼가 자라는 동안 논은 계속 물에 차 있어야 한다. 따라서 모내기를 준비하는 5월 초순경부터 벼가 완전히 자라는 8월 중순 어간까지 논은 물이 찬 무논이 된다.
벼농사를 위한 논은 이렇듯 물을 가두기에 큰비가 오거나 장마가 져도 홍수를 막아주는 구실도 하게 된다. 한국에는 산이 많아 계곡도 많기에 비가 오면 계곡에서 많은 양의 물들이 급류로 흘러내려 홍수가 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비가 많이 오는 여름 장마철에도 홍수가 많이 나지 않은 것은 계곡 입구부터 자리 잡은 논들이 그 물을 거의 다 가두어 놓거나, 너무 많은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잡아두었다가 천천히 조금씩 흘려 내보내기 때문이다. 논은 개별적으로는 매우 적은 규모이지만 전부 합하면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규모의 저수지 역할도 하는 셈이다. 이는 계곡 입구와 인근의 물난리를 막는 논의 매우 중요한 구실이다.
논은 또 많은 수서 동물들의 서식지로 구실하기도 한다. 논은 모내기 때부터 벼 수확을 위해 물을 미리 빼기 전까지 계속 물이 차 있기에 많은 수서 동물들의 생활 터전이기도 하다. 그래서 논은 생물의 다양성에도 기여한다. 예컨대, 소금쟁이, 물방개, 물자라, 물땡땡이, 송장헤엄치게, 장구벌레, 잠자리 유충, 거머리, 우렁이, 참게, 토하, 미꾸라지, 피라미, 송사리, 붕어, 개구리, 물뱀 등등 무수하다.
이밖에도 잠자리, 메뚜기, 섬서구, 멸구를 비롯한 곤충들도 벼들에 붙어서 또는 그 사이에서 살아간다. 이 가운데 전래동화 ‘우렁 각시’의 소재가 된 우렁이는 된장찌개, 참게는 간장게장 또는 붕어 등과 함께 매운탕, 미꾸라지는 추어탕, 토하는 토하젓, 누런 메뚜기는 간장 볶음 등에서 보듯 단백질 공급원으로 우리의 식생활의 일부가 됐다.
오늘날에는 수서 동물 서식지로서의 무논을 아예 양식업에 활용하기도 한다. 이는 ‘내수면 생태 양식’ 또는 영어로는 아쿠아포닉스(aquaponics)라고 부르는데 어업인 물고기 양식(aquaculture)과 농업인 수경재배(hydroponics)를 결합한 생산 방식의 한 적용이다.
논에서 벼농사와 함께 수서생물의 양식을 병행하는 것이다. 본래 우렁이, 붕어, 잉어, 가물치, 심지어는 날짐승인 오리 등이 그 대상이었으나 최근에는 비단잉어, 관상용 새우 등 고부가가치가 있는 수서 생물들을 양식하기도 한다.
이런 양식용의 수서 생물들은 논을 헤집고 다니면서 잡초의 발아도 막고, 각종 해충과 잡초를 먹어치우기도 하고, 배설물로 천연 비료까지 제공하는 등으로 많은 이점이 있어 친환경 농업으로 권장되고 있다고 한다.
논은 또, 모내기 전후부터 7월까지는 낭자한 개구리 울음소리로, 벼가 자라 키가 커진 7월부터는 푸르디푸른 대초원으로, 가을에 벼가 익으면 굽이치는 황금물결로, 농촌 특유의 풍광을 제공한다. 중부 지방은 5월 중순부터, 남부지방은 5월 말부터 모내기를 하는데 이때부터 논은 물을 가두어 놓아 무논이 된다.
이런 무논에 많은 개구리들이 모여드는데 초저녁부터 밤새도록 수컷이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울어댄다. 그 울음소리가 매우 애절하고 낭자하여 초여름부터 한여름까지의 농촌의 특징적인 청각적 풍경이 된다. “짙은 밤꽃 냄새 아래/들리는 것은/천지를 진동하는 개구리 소리/유월 논밭에 깔린/개구리 소리”[조병화, 〈첫사랑〉 중에서].
논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풍경은 모가 상당히 자라야 형성된다. 모내기 직후에는 벼가 어리고 작아서 논은 초원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벼는 무럭무럭 자라기에 7월쯤부터는 상당히 자라 논을 녹색의 초원으로 변모시킨다. 그래서 한여름부터 논이 많은 농촌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시원스럽고 거대한 녹색 초원이 전개된다.
그러다가 가을에 벼가 익어서 노란색으로 변하면 논은 멀리서 보면 외경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황금색 물결이 굽이치는 넓고 아름다운 들녘으로 변모한다. 이처럼 벼농사는 여러 가지 풍광으로 우리의 정서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벼농사는 그 주목적인 쌀을 생산하는 동안 부수적으로 홍수를 막아주고, 생물 다양성에 기여하고, 생태 양식을 통해 별도의 수산물을 생산하고, 여름부터 가을까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멋진 풍광을 제공한다.
이런 과정에서 벼농사는 우리의 안전, 식생활, 정서 등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들은 벼농사의 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벼농사와 그 부수적인 덤에 의해 오늘날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과 정서는 주식인 쌀을 생산하는 벼농사에 의해 생각보다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효성 주필·전 성균관대 언론학과 교수·전 방송통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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