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성의 시사칼럼] 인공지능 시대의 한글
2024-10-29

눈이 오기 위해서는 높은 하늘에 떠 있는 물방울들이 얼어야 하고 내려오는 동안 녹지 않아야 하기에 기온이 0℃ 이하로 내려가야 한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고 가장 추운 곳은 대관령이다. 따라서 대관령은 한국에서 첫눈이 가장 먼저 오고, 가장 눈이 많이 오는 곳이다. 대관령에서 첫눈은 대체로 11월 중순이나 하순 경이다. 그러나 서울이 있는 중부 지방의 첫눈은 대체로 11월 하순이나 12월 초순 무렵이다. 그런데 중부 지방에서의 첫눈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제대로 쌓이지도 않는 경우가 많다.
금년에는 서울에서 지난 11월 27일 첫눈이 수북이 쌓일 만큼 많이 내렸다. 공식적인 하루 최고 적설은 16.5cm로 근대적인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117년 만의 매우 이례적으로 많은 양이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서울을 비롯한 중부 지방에서 제대로 쌓인 눈을 볼 수 있는 시기는 아무래도 12월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중부 지방에서는 눈이 많이 내리지 않기에 눈이 내려도 수북이 쌓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중부 지방에서 눈이 수북이 쌓이는 경우는 한 겨울을 통 털어 두세 번에 불과하다. 특히 근래에는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인지 눈이 점점 더 적게 내린다. 한국에서 자주 눈이 내리고 수북이 쌓이는 곳은 대체로 강원도의 산간 지역과 호남의 해안 지역이다.
그런데 눈은 매우, 어쩌면 가장, 대표적인 겨울의 물상일 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물상이다. 눈은 아무런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그저 그런 물상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어떤 특정한 감흥을 일으키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게 자극하기 때문이다. 첫눈은 특히 더 그러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첫눈이 오기를 기다린다.
“첫눈은 언제 오나./나는 첫눈을 기다리지.//첫눈이 와야/정말 겨울이 시작되지.”[이준관, 〈첫눈은 언제 오나〉 중에서]. 첫눈이 오면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눈이 온다!”고 외치며 실내에 있던 사람들은 일부러 밖으로 나와 눈을 반기며 맞기도 한다. 게다가 많은 이들이 첫눈이 오면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를 갖게 된다. 첫눈은 흔히 서설(瑞雪: 상서로운 눈)로 간주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거개의 사람들이 눈을 반긴다. 눈이 올 때 많은 이들이 반가운 나머지 연인이나 가까운 친지에게 그 소식을 전한다. 눈이 오면 데이트를 약속하는 연인들도 많다. 그만큼 눈이 오는 것은 중요한 뉴스이고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눈이 오는데도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리 친밀한 사이라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을 정도다.
눈은 많은 이들을 마냥 설레게 하거나 기쁘게 한다. 또 많은 이들이 눈이 오면 어린 시절을 비롯하여 까마득히 잊었던 옛 추억이나 일이나 이들을 떠올리고 그리움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만큼 눈은 사람들에게 강한 감성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정서적인 물상인 것이다.
눈은 저 높은 하늘로부터 하늘하늘 내려온다. 또는, 한 시인의 표현처럼, “선녀의 날개옷/빌려 입고/흰나비 떼 되어/춤추며 내려”[최범서, 〈함박눈〉 중에서] 온다. 눈은 고체임에도 얼굴에 맞아도 아프지 않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듯하다. 그래서 눈은 차가운 것이지만 오히려 따뜻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런 눈이 내려 소복소복 쌓이면 하얀 빛으로 삼라만상을 덮어 가려 깨끗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연출한다. 이런 특성으로 눈은 사람들에게 거부감 대신 호감을 줄 뿐이다. 그래서 비와는 달리 눈은 싫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게다가 눈은 우리 피부에 닿거나 온도가 영상으로 오르면 곧 녹아 물이 되어 사라지기에 아쉬움마저 남긴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 하얀 눈이 펄펄 날리거나 함박눈이 쏟아질 때는 흔히 온 사위가 어둑하고 적막한 풍광이 펼쳐진다. 그런 상황에서 눈은 아스라이 먼 곳에서 우리에게 다가오기에 자연스럽게 잊었던 기억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눈을 천상에서 보낸 천사이기라도 한 듯, 또는 좋은 소식을 가져온 귀한 손님이기라도 한 듯, 반갑고 경건한 마음으로 맞는다. 그 만큼 사람들에게 눈은 한 송이 한 송이가 다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 또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김광균, 〈설야〉 중에서]을 가져오는 메신저로 느껴지는 것이다.
눈은 찬 물상임에도 우리에게는 부드럽고 포근하고 따뜻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래서 쌓인 눈은 흔히 이불에 비유된다.
“지난밤에/눈이 소오복히 왔네//지붕이랑/길이랑 밭이랑/추워한다고/덮어주는 이불인가봐”[윤동주, 〈눈〉 중에서].
실제로 눈은 쌓이면 가을보리를 덮어서 찬바람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이불 같은 구실을 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눈은 우리의 감성을 풍성하게 하고 우리의 삶을 순화시키는 다분히 정서적인 물상이다. 따라서 겨울이 있고 눈이 내리는 온대에 산다는 것은 그만큼 정서적으로 풍부한 삶을 사는 것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매우 적은 양밖에 내리지 않을지라도, 눈이 오는 겨울을 가진 한반도의 주민들은 큰 행운을 누리고 사는 것이다.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이효성 전 성균관대 언론학과 교수·전 방송통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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