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르네상스] <50> 작곡가 박시춘과 손목인
2025-04-24
‘그 옛날 오색댕기 바람에 나부낄 때, 봄나비 나래 위에 꿈을 실어 보았는데, 날으는 낙엽 따라 어디론가 가버렸네, 무심한 강물 위에 잔주름 여울지고, 아쉬움에 돌아보는 여자의 길’(여로)
‘아씨’와 ‘여로’는 드라마의 주제곡이다.
동양 텔레비전(TBC)에서 1970년 3월부터 이듬해 1월 초까지 253회에 걸쳐 방영한 ‘아씨’는 본격적인 TV 일일 연속 드라마의 효시였다. 뒤이어 안방극장을 강타한 KB
S의 ‘여로’와 함께 1970년대 대한민국 TV 방송시대를 연 드라마의 표상이다. ‘아씨’와 ‘여로’는 광복 후 우리 현대사의 풍랑과 가부장적 유교문화의 질곡 속에서 시린 인고(忍苦)의 삶을 살다간 여인들의 눈물겨운 이야기이다.
‘아씨’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광복 후 1950년대까지를 시대 배경으로 여필종부(女必從夫)를 미덕으로 삼았던 한국 여성상을 그렸다. 양반가에 시집온 아씨는 남편의 외도와 냉대는 물론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구박 속에서도 인내와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 더구나 남편이 신여성과 바람을 피워서 낳은 말썽꾸러기 아들까지 친자식처럼 키우며 시부모를 봉양하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의 길을 걷는다.
그것은 모진 시련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묵묵히 희생적인 여정을 걸어간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의 얘기였다. 그러한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상이 온국민을 울렸던 것이다. ‘아씨’의 삶은 이미자의 감성어린 노래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작가인 임희재가 쓴 가사도 참으로 아름답다.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라는 마지막 구절은 한많은 삶과 그 승화된 정서의 결정체이다.
‘아씨’는 파란 많은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껴안고 살아온 한국 여인들의 얼룩진 정한을 대변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방송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보여주었던 전설적인 방송드라마 ‘여로’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
1972년 4월부터 12월까지 방영한 ‘여로’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 생계를 위해 술집을 전전했던 분이(태현실)의 삶을 통해 한 여인의 여로(女路)를 겨레의 여로(旅路)로 변주한 미증유의 히트작이었다.
분이의 남편은 바보 같은 영구(장욱제)였다. 모자라는 아들과 짝을 지어 대나 잇자는 요량으로 맞이한 부잣집 며느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술집에서 일한 과거까지 드러나면서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모진 구박 끝에 시댁에서 쫒겨 나고 만다. 하지만 6.25 전쟁의 와중에 부산에서 국밥집을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번 분이는 장애인교육재단을 세워 사회봉사 활동을 하는 사연이 신문에 실렸다.
이를 본 남편 영구와 아들 기웅이 아내와 어머니와 극적인 재회를 하고, 몰락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며 오순도순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방송 시간이면 거리가 한산했을 정도로 온국민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아씨’와 ‘여로’는 라디오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TV 시대를 맞이하는 1970년대의 열풍이었다. 두 드라마는 시대적인 배경이나 전통적인 여인상을 그린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결이 다르다.
‘아씨’는 평생 밖으로만 나돌던 남편이 끝내 객지에서 죽고 시부모도 세상을 떠나자 퇴락한 집안에 홀로 남아 쓸쓸한 여생을 보낸다. 이렇게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아씨’에 비해 ‘여로’의 여주인공은 모진 운명을 극복하고 삶을 개척해나가는 보다 능동적인 여성상을 보여줬다. ‘아씨’와 ‘여로’를 새삼 되돌아보는 것은 그것이 곧 오늘날 영욕의 우리 한국 사회를 낳은 모태였기 때문이다.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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