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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 르네상스] <60> 전쟁가요(5)-전란 속의 서정

‘삼다도 소식’·‘봄날은 간다’ 등 서정적 노랫말 압권
한양경제 2025-07-14 09:43:26
베토벤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고난을 겪던 1809년에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썼다. 차이코프스키는 조국 러시아가 나폴레옹군을 물리친 전쟁을 테마로 ‘1812년 서곡’을 완성했다.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며 피아노 3중주곡을 썼다. 6·25 전쟁의 참혹한 시련 속에서도 주옥같은 서정 가요들이 탄생했다. 전란의 피폐와 절망도 삶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삼다도라 제주에는 아가씨도 많은데, 바닷물에 씻은 살결 옥같이 귀엽구나, 미역을 따오리까 소라를 딸까, 비바리 하소연이 물결 속에 꺼져가네, 음~~ 물결에 꺼져가네’. 황금심의 구슬픈 목소리에 실은 ‘삼다도 소식’에는 전쟁의 와중에 나온 노래인데도 불구하고 대포 소리나 화약 냄새가 없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서정적인 노랫말과 멜로디가 바닷물결처럼 일렁거린다.  

‘삼다도 소식’은 그야말로 바람과 돌과 비바리가 많은 삼다(三多)의 고장에서 빚은  가요이다. 1·4 후퇴로 전세가 다시 기울었을 때 제주도 모슬포에 있던 육군 제1훈련소에서 만든 노래이다. 훈련소의 군예대(軍藝隊) 소속이었던 박시춘이 작곡하고 유호가 작사를 했다. 금사향이 부른 ‘임 계신 전선’도 제주도 군예대 시절에 지은 가요이다. 가요인들은 그렇게 총들지 않은 문화전쟁을 수행했다. 

총탄이 스쳐가는 전장에서도 위문공연을 하며 웃음을 버리지 않았다. 사선을 넘나드는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고, 전란에 휩쓸린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연예활동을 당연한 본분으로 여겼다. 사람들은 해변의 바람소리와 해녀의 숨비소리 아련한 ‘삼다도 소식’을 들으며 전쟁의 시름을 달래고 평화를 꿈꿨다. 모슬포를 배경으로 지은 이 노래는 참담한 전란의 시국에 피워올린 구성진 절창이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6·25 전쟁기에 백설희가 띄어보낸 ‘봄날은 간다’는 너무 화사해서 더없이 슬픈 봄날의 역설이다. 전란 속의 화려한 봄날은 차라리 형벌이었다. 가녀린 봄바람인들 전쟁이 할퀴고 간 시린 상처를 어찌 비켜갈 것인가.  

‘봄날은 간다’는 전쟁이 초래한 청춘의 소멸과 낭만의 소진을 탄식한다. 한국 시인들의 최고 애창곡으로 선정되기도 했던 이 노래는 전쟁의 막바지인 1953년 대구에서 발표됐다. 알뜰한 맹세가 실없는 기약으로 전락하는 애상적인 여심(女心)을 강렬하게 표현한 노래 속에는 가이없는 그리움을 소환하는 신비한 묘약이 깃들어 있다.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에 선 한국인의 서러운 정서가 흠뻑 배어있다.  

노랫말은 ‘연분홍 치마’ ‘산제비’ ‘성황당’ ‘앙가슴’ 등 정감 어린 옛 단어들의 능숙함을 구사한다. ‘휘날리더라’ ‘흘러가더라’ 등의 회상형 종결어미를 애절한 체념적 선율에 실으며 한국인의 고유한 감성을 길어올렸다. ‘봄날은 간다’는 제목 하나만으로도 봄의 끝자락에 울려 퍼지는 슬픔과 종말의 정서가 꿈틀거린다. 화약 연기와 함께 스러져간 청춘의 내면 풍경이 눈물겹다.  

‘봄날은 간다’는 세파에 지친 대중의 심사를 정화시키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전쟁이 초래한 청춘의 낙화(落花)를 속절없이 스러져가는 봄날의 풍경과 대비시킨 짙은 서정이 압권이다. 수많은 젊은 목숨들이 동족상잔의 포연 속으로 봄날의 아침이슬처럼 사라져가지 않았던가. 그렇게 슬퍼서 그렇게 아파서 더 애틋한 노래이다. ‘봄날은 간다’는 한국인만의 고유한 한(恨)의 정조를 머금은 불후의 명곡이다.


조향래 대중문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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