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르네상스] <58> 전쟁가요(3)-피란살이의 애환
2025-06-26
무수한 가정을 잔혹하게 파괴하고 멀쩡한 가족을 마디마디 해체하며 50만 명의 미망인과 10만 명의 고아를 양산했다. 부모를 잃어버린 채 생일조차 알 수 없는 고아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전란이 남긴 또 하나의 비극적 산물이었다. 그것은 당시 한국 사회가 당면했던 속절없는 전후의 통증이기도 했다.
‘어머니 아버지 왜 나를 버렸나요, 한도 많은 세상길에 눈물만 흘립니다, 동서남북 방방곡곡 구름은 흘러가도, 생일 없는 어린 넋은 어디메가 고향이요’. 김용만의 ‘생일 없는 소년’이 나온 시대적인 배경이다. 이 노래는 1950년대 중후반 고아 출신인 김성필이 펴낸 ‘어느 고아의 수기’에서 비롯됐다. 전쟁 고아들의 비참한 사연이 사회의 주목을 이끌어내며 노래와 영화로도 만들어진 것이다.
현대사의 격랑에 휩쓸린 가족의 비극은 전쟁의 상흔이 역력했던 대중의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김용만의 애틋한 목소리를 타고 눈물샘을 자극했던 ‘생일 없는 소년’은 그러나 10여 년 후 방송금지 조치를 받는 불구의 신세가 되기도 했다. ‘어머니 아버지 왜 나를 버렸나요’ 등의 가사가 지나치게 비탄조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고아들의 눈물과 탄식마저 소리없이 침잠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비둘기가 울던 그 밤에 눈보라가 치던 그 밤에, 어린 몸 갈 곳 없어 낯선 거리 헤매이네, 꽃집마다 찾아봐도 목메이게 불러봐도, 차가운 별빛만이 홀로 새우네 울면서 새우네’. 반야월이 노랫말을 짓고 박시춘이 작곡을 해서 백설희가 부른 ‘가는 봄 오는 봄’은 고아들의 서러운 삶과 고달픈 처지를 절절하게 대변한 노래다. 1959년 제작한 동명의 영화 주제가로 상승 효과를 내며 시대의 아픔을 토로했다.
‘생일 없는 소년’이나 ‘가는 봄 오는 봄’보다는 몇 해 전에 나온 ‘어린 결심’이라는 노래는 숙명적으로 마주한 고달프고 험난한 인생 고개를 눈물겹게 극복해나가는 고아의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그렸다. ‘한청빌딩 골목길 전봇대 옆에, 나는야 구두닦이 슈샤인 보이, 나이는 열네 살 고향은 황해도, 피난 올 때 부모 잃은 신세이지만, 구두 닦아 고학하는 학생이래요’.
가수 남인수가 작사가 반야월이 쓴 이 노래의 가사를 받아들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도 있다. 아버지가 일찍 타계한 후 개가(改嫁)한 어머니를 따라 온갖 풍상을 겪으며 살아온 자신의 삶이 전쟁 고아들의 처절한 여정과 겹쳤기 때문일 것이다. 구두닦이나 신문팔이를 하며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고학을 하며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그나마 운이 좋은 건실한 고아들도 없지는 않았다.
121년 하와이 이민의 역사를 월드클래스 아티스트들의 아름다운 연주와 함께 들려주는 감성 음악영화가 ‘하와이 연가’다. 여기에 출연한 그래미상 수상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은 자신 또한 한국전쟁 고아인 어머니의 아들임을 고백했다. 미국의 아일랜드계 오닐가에 입양된 어머니가 낳은 한국의 외손자라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파생된 탁류와 그 속에서 피어난 연꽃같은 가족사이다.
전쟁은 흉악한 악마였고 간악한 사탄이었다. 전선의 포화 속에 스러져간 젊은 군인과 피란길에 유명을 달리한 민간인 사상자가 얼마였던가. 그리고 남북으로 흩어져 생사를 모르는 이산가족의 고통과 부서진 가정의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와중에 폐허가 된 절망의 거리에 지향없이 홀로 선 고아들의 삶은 얼마나 처연했을까. 대중가요가 그것을 노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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