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성의 자연에세이] <28> 식목과 우리 조상의 지혜
2025-04-14

10월은 한가을로 날씨가 연중 가장 청명하고 선선한 때다. 한낮의 햇볕은 약간 따갑기도 하지만 대체로 따스하다고 할 수 있다. 10월은 흔히 대기는 맑고 건조한데다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와 기분이 상쾌한 철이다. 10월은 그 선선하고 상쾌한 날씨로 인해 나들이를 하기에도 적합한 철이다. 그래서 야유회, 운동회, 등산모임, 여행 등 각종 야외행사가 연중 가장 많은 달이기도 하다. 그러나 10월은 추분이 지난 시점이어서 갈수록 낮보다 밤이 길어지며 일교차가 심해진다. 그로 인해 대지는 점점 더 식어가고 밤에는 상당히 차가워서 찬이슬이 많이 맺히게 된다. 그래서 24절기는 10월 초순 어간에 ‘한로(寒露)’ 절기를 두고 있다. 하순에 이르면 밤에는 기온이 더 차져 0도 이하로 떨어지므로 이슬이 얼어 서리가 내리게 된다. 24절기에 10월 하순 어간에 ‘상강(霜降)’ 절기가 있는 이유다.
10월에는 날씨가 차지면서 자연과 풍광에 많은 변화가 나타나는 달이다.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변화는 나뭇잎이 변색하여 단풍이 드는 일일 것이다. 사실 변색이 이른 느티나무, 벚나무, 담쟁이덩굴, 철쭉, 화살나무 등의 나뭇잎은 9월 초순부터 조금씩 또는 부분적으로 단풍이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무의 잎들은 10월이 되어 최저 기온이 5도 이하로 떨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변색하여 형형색색으로 단풍이 든다. 그러다가 최저 기온이 0도 이하로 떨어지면 단풍잎들이 조락하여 땅위에 수북이 쌓이게 된다. 단풍은 온도가 낮은 곳에서부터 들기에 산의 정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산 아래로 내려오고, 위도가 높은 북쪽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온다. 그리하여 10월 하순이나 11월 초순에 이르면 전국의 낙엽수들이 다 단풍이 들어 장관을 이룬다. 이처럼 10월은 화려하게 단풍이 드는 계절이다.
나무만이 가을의 풍광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10월의 풍광의 변화에는 풀들도 큰 몫을 한다. 우선 10월이 되어 기온이 떨어지면 들에는 대부분의 화려한 풀꽃들은 시들어버리고 대체로 들국화로 통칭되는 국화과의 식물들이 소박한 꽃을 피우고 있다. 구절초, 쑥부쟁이, 산국, 황국, 벌개미취 등의 들국화는 가을 언덕에 다소 쓸쓸한 모습으로 서늘한 바람에 흔들리며 은은한 향기를 풍긴다. 가을 들녘의 풍광을 더욱 쓸쓸하게 만드는 것은 큰 줄기 끝에 하얀 솜털을 단 억새나 잿빛 솜털을 단 갈대의 꽃 이삭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다. 특히 주로 언덕에서 자라는 하얀 솜털이 부푼 키 큰 억새의 꽃 이삭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은 더 큰 비애감을 일으킨다.
10월은 벼, 조, 수수, 콩, 고구마 등의 주요 작물을 거두는 추수의 철이기도 하다. 10월에 이르면 이들 작물들은 다 익을 대로 익어서 거두게 된다. 그런데 만일 추수가 너무 늦어져 작물들이 서리를 맞게 되면 서리태를 제외하고는 맛도 떨어지고 상하기도 쉽다. 그래서 서리가 내리기 전에 반드시 추수를 해야 하고 그러려면 늦어도 10월 중순까지는 추수를 마쳐야 한다. 그런데 추수를 마치고 나면 들판은 휑하니 색깔이 사라진 무채색의 빈 들녘이 되고 만다. 특히, 황금빛 물결로 아름답게 출렁이던 벼들이 거두어진 들판은 더욱 더 그렇다. 추수를 마친 들녘은 그 풍광과 그에 대한 우리의 정조를 완전히 바꿔버린다. 익은 곡식으로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성하던 들녘은 추수로 인해 어느덧 텅 비어 우리에게 공허함과 쓸쓸함과 음울함을 안겨주는 것이다.
10월은 철새가 바뀌는 철이기도 하다. 철새 가운데는 봄에 남쪽에서 날아와서 여름에 번식을 하고 가을에 다시 남쪽으로 날아가는 제비, 뻐꾸기, 두견이, 소쩍새 등의 여름철새가 있고, 반대로 북쪽에서 번식을 하고 가을에 날아와서 겨울을 나고 봄에 다시 북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청둥오리, 두루미, 독수리 등의 겨울철새가 있다. 이들 철새의 교대 시기가, 즉 여름철새가 가고 겨울철새가 오는 때가, 대체로 10월이다. 일상에 쫓기거나 자연의 변화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철새가 바뀌는 것은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10월 북녘에서 몰려온 수십만 마리의 철새들이 도래지에서 한꺼번에 떼로 나는 모습을 포착한 영상을 본 경우는 더러 있을 것이다. 아니면 어느 날 문득 기러기들이 무리를 지어 끼륵끼륵 소리를 내며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겨울철새들이 날아오고 있는 것이다. 여름철새가 왔던 봄이 엊그제 같은 데 벌써 겨울철새가 몰려오는 시절이 된 것이다.
이처럼 10월에는 기온이 낮아지면서 경물에 급격한 변화가 온다. 그 변화는 우리의 의식과 정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차가워진 날씨로 한편으로는 활엽수의 나뭇잎들이 단풍으로 물들어 산야를 오색으로 화려하게 물들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잎들이 낙엽으로 져서 땅위에 나뒹굴며 슬픔을 일으킨다. 그리고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한층 더 처량해지고, 풍성하던 들녘이 추수로 텅 비게 되고, 여름 철새가 어느덧 겨울 철새로 바뀌게 되고, 줄기 끝에 하얀 보푸라기를 단 키 큰 억새가 언덕에서 갈바람에 흔들리며 쓸쓸함을 자아낸다. 이런 모습들로 인해 사람들은 사물과 생명의 무상(無常)을 깨닫고 우수와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가을은, 특히 시월은, 그 특유의 경물로 풍요와 화려의 철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비애와 우수의 철이기도 한 것이다.

이효성 전 성균관대 언론학과 교수·전 방송통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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