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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성의 자연에세이] <32> 열매와 동물의 상생

녹색의 어린 열매 잎에 숨어 자라더니
어느덧 빨강 노랑 눈에 띄게 무르익어
동물들 어서 먹으라고 유혹하고 있구나
한양경제 2025-06-16 10:18:23
서울 개포동의 한 마을에서 살구들이 익어가고 있다. 이효성

여름은 열매가 열리고 성장하는 계절이다. 

‘여름’이라는 말의 어원에서 보더라도 그렇다. 여름은 열매를 맺는다는 뜻을 가진 자동사 ‘열다’의 동명사형 ‘열음’이 ‘여름’으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이 경우 ‘여름’은 본래 열매라는 뜻이며 계절로서 ‘여름’은 열매가 열리는 때를 뜻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름은 태양의 열기를 이용해 식물들이 광합성을 왕성히 함으로써 곡식이나 과일로 인간을 비롯한 동물에게 먹을 것이 되어주는 둥근 열매를 맺어 성장시키는 계절인 것이다. “하루에 한 번씩/하늘 길 다녀가는 저 화신(火神),/하늘에 뜬/숭고한 저 얼굴을 지향하다/열매들은/아름다운 빛깔로/태양의 얼굴을 닮아 가는가”[박덕중, 〈태양이 떠오르면 2〉 중에서]. 

초여름은 매실, 살구, 자두, 버찌, 앵두, 오디 등과 같이 비교적 일찍 완숙하는 일부 열매들을 수확할 수 있는 시기다. 일반적으로 열매들은 여름 내내 성숙하여 구시월에 완숙하지만 일부는 이처럼 빨리 완숙하여 먹거나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열매를 종류에 따라 조미료, 기름, 섬유, 약재 등으로도 쓰지만, 역시 가장 큰 용도는 식용이라 할 수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모든 열매를 인간이 다 먹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동물들은 먹지만 인간은 먹지 않는 열매들도 있다. 어쨌든 열매는 인간이나 동물에게는 중요한 먹이다. 반대로 열매는 동물에 먹힘으로써 그 속의 씨앗을 퍼뜨릴 수 있게 된다. 열매는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 동물을 유혹하는 식물의 미끼인 셈이다. 

열매는 본래 속씨식물이 수정한 후, 씨방이나 그 주변의 기관(꽃받기, 꽃받침 등)이 자라 만들어진 것으로 씨를 품고 있는 구조를 일컫지만 흔히 겉씨식물의 씨앗도 포괄한다. 바꾸어 말하면, 열매는 씨와 그리고 씨를 보호하고 있는 껍질 부분을 합해 일컫는 말로써 씨를 보호하는 한편 씨를 퍼뜨리는 구실을 한다.  

열매의 껍질과 씨 사이에는 흔히 과육으로 불리는, 대체로 영양분이 많은 부분이 있는데 이 과육을 인간이나 동물이 먹으면서 속의 씨앗을 퍼뜨리게 된다. 그런데 곡류의 경우에는 그런 과육이 없고 껍질이 얇아 씨 그 자체를 먹는다. 겉씨식물의 경우는 씨방이 없어 씨가 겉으로 드러나는데 은행이나 잣에서 보듯이 단단한 껍질로 쌓여 있어 그 껍질을 깨고 그 안의 씨앗을 먹는다. 

익기 전의 열매는 잎과 같은 녹색이고 잎들에 가려져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게다가 단단하고 맛도 없는데다 흔히 독성분도 있어 인간이나 동물에게 잘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익으면 대체로 빨간색이나 노란색이나 검정색 등의 화려한 색깔로 변해서 눈에 잘 띄고 물러지면서 독성분도 사라지고 대체로 단맛이 드는 등 맛이 좋아져 인간이나 동물이 잘 먹을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성숙한 열매는 흔히 동물을 이용하여 씨를 퍼뜨리고 동물은 열매를 통해 영양분을 섭취한다. 열매와 동물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상생관계에 있는 것이다. 열매는 동물과의 상생을 통해 종족을 유지하는 생태계의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이 때문에 열매는, 매실, 살구, 자두, 버찌, 포도, 복숭아, 대추, 밤, 사과, 배, 감, 귤 등에서 보듯이, 농산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과일은 인간의 삶에 중요한 구실을 하는 만큼 커다란 문화적 또는 상징적 의미를 갖기도 한다. 예컨대, “열매를 맺다”는 관용구는 노력한 일의 성과가 나타난다는 상징적 의미로 많이 쓰인다. “열매 될 꽃은 첫 삼월부터 안다”는 속담은 잘 될 일은 그 기미부터 좋음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열매의 동의어인 ‘과실(果實)’은 열매라는 뜻 외에도 원물(元物)에서 생기는 이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열매는 인간에게 귀중한 깨달음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한 시인은 열매의 둥글둥글한 생김새에서 교훈을 얻는다. “그대는 아는가./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오세영, 〈열매〉 중에서]. 다른 시인은 열매가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성숙하는 점에서 교훈을 얻는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장석주, 〈대추 한 알〉 중에서].  

“푸른 하늘 아래/탐스러이 익은 과일도/비바람과 천둥, 무더위를/견디며 영글었으리/시달리지 않고 익는 열매가 어디 있으랴.”[조남명, 〈열매〉 중에서]. 성숙한 후에는 종말에 이르는 세상의 이치를 열매에서 깨닫는 이도 있다. “한 우주가 떨어진다/서로 모순되던/희로애락의 계절이/스스로가 겪은 대로, 그만치/하나의 맛으로 엉겨서/적막한 천지로 떨어진다.”[조병화,〈열매〉중에서]. 

열매는 그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모양으로 생기고 자라는 점으로, 천둥번개와 비바람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성숙하는 점으로, 다 성숙한 후에는 떨어지고 썩어 문드러져 사라지는 모습으로, 교훈을 주는 것이다. 인간에게 열매는 그 과육과 씨앗을 통해 영양분을 주기도 하고, 그 생김새와 성숙과 낙과와 소멸의 과정을 통해 깨달음을 주기도 하는, 참으로 고마운 존재다.

이효성 전 성균관대 언론학과 교수·전 방송통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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