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성의 자연에세이] <28> 식목과 우리 조상의 지혜
2025-04-14

초여름은 흔히 기후적으로는 온도와 습도가 높아져 무더워지는 계절로 특징지워진다.
그러나 초여름을 특징짓는 가장 뚜렷한 모습은 그 더위보다는 녹색의 빛깔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초여름은 5월의 연초록 잎들이 강렬한 햇빛의 세례를 받아 점점 더 진초록으로 바뀌는 시절이다.
나뭇잎은 크게 자라 진초록으로 우거지고 풀들은 강한 향기를 풍기게 된다. 소위 ‘녹음방초(綠陰芳草)’의 시절이 된 것이다. 이 시절은 “녹음방초가 꽃보다 더 좋은 때(綠陰芳草勝花時)”라는 말로 불리기도 한다. 그 정도로 우거진 나무와 향기를 내뿜는 풀이 초여름을 반기게 만든다. “심신을 맑게 활력을 주고/짙푸른 녹음 속에서 맑아지는 영혼/청산에서 신기하게 호흡 한 번에/아픔도 고뇌도 사라지고”[김덕성, 〈여름 청산에 가면〉 중에서].
이처럼 초여름인 6월은 짙은 녹색이 지배하는 시절이다. 그리고 녹색이 상징하는 생명 활동이 가장 왕성한 때이기도 하다. 여름에는 낮이 길어 햇빛이 비치는 시간이 길고 해의 고도가 높아 햇빛이 매우 강렬하다.
그렇지만 아직은 초여름이어서 복사열이 그다지 쌓이지 않은 때라 7~8월처럼 생명체를 힘들게 하는 찜통 같은 무더위가 지배하는 때는 아니다. 대신, 긴 낮과 강한 햇빛으로 다부지게 자란 진초록의 나뭇잎이나 풀잎은 광합성을 오랫동안 활발하게 할 수 있고 그 덕으로 나무나 풀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나무나 풀의 입이 자라고 우거지면 초식동물도 먹이가 풍부해져 생명 활동이 활발해지고, 그렇게 되면 초식동물을 먹이로 하는 육식동물도 먹이가 풍부해져 그들의 생명 활동도 활발하게 된다. 그 결과 6월에는 모든 생명체의 생명 활동이 가장 활발해지고 먹이사슬이 잘 작동된다고 할 수 있다.
생명 활동은 크게 번식(繁殖) 또는 생식(生殖) 활동과 성장 활동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번식 활동은 종족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이고, 성장 활동은 개체를 성숙시키는 활동이다. 번식 활동은, 식물의 경우는 꽃을 피워 씨앗을 품은 열매를 맺고 익히는 일로, 인간을 포함해 동물의 경우는 암수가 짝짓기를 통해 새끼를 낳고 기르는 일로, 구현된다. 여름은 온도가 높아서 꽃이나 어린잎이 냉해를 입을 염려가 없고, 막 부화하거나 태어난 동물들의 어린 새끼들이 추위로 위험에 처할 염려가 전혀 없다.
그리고 여름은 빛과 수분이 충분해지기에 식물들은 활발한 광합성으로 양분과 수분을 가지와 열매에 보낼 수 있어 개체를 키우는 데에도 유리하다. 그리고 동물들은 그 먹이가 되는 연한 잎이나 곤충들이 풍부해지기에, 새끼뿐만이 아니라 어미 자신도 충분히 먹이를 취할 수 있기에 자신의 성장에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래서 여름, 특히 초여름은 번식과 성장에 매우 유리한 것이다.
서양에서는 하지가 있는 6월이 사랑을 확인하고 실현하는 약혼과 결혼의 달이기도 하다. 유럽은 위도가 높은 나라들이 많은데 그들 나라에서는 여름이 우리의 따뜻한 봄 날씨 정도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는 하짓날 결혼한 신혼부부의 사랑과 다산을 위해 결혼 첫 달 동안 그 해의 첫 꿀로 만든 음식을 먹였던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허니문(honey moon)’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했다.
곤충들의 경우에도 초여름부터 부쩍 많이 출현한다. 잎을 먹고 자라는 애벌레들은 연한 연초록의 잎들이 풍부해서 이것들을 마음껏 먹고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 새들의 경우에는 먹이가 풍부한 초여름부터 알에서 새끼를 부화시킨 다음 성충과 그 애벌레 등 곤충들을 먹이로 새끼에게 물어다주며 키워낸다. 개구리도 물속에 올챙이의 먹이가 풍부한 이 무렵 번식을 위해 수컷이 울음으로 암컷을 유인한다.
식물의 경우에도 초여름부터 그 번식활동이 매우 활발해진다. 이는 여름에 가장 많은 꽃들이 피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실제로 여름에 숲과 풀밭을 자세히 보면 봄꽃처럼 화사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꽃들이 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한 개체의 꽃망울들이 일시에 다 피어버리는 봄꽃들과는 달리, 여름꽃들은 한 개체에서 새로운 꽃들이 계속 피어나기에 대체로 오랫동안 피어나는 특징이 있다.
이 무렵부터 화단에서는 분꽃, 과꽃, 채송화, 봉숭아, 백일홍, 접시꽃, 작약 등이, 그리고 뜰이나 담장에는 둥근 공 모양으로 모인 수국, 오전에 피었다 지는 나팔꽃, 향기가 좋아 관상수로 많이 심는 백리향 등의 여름 꽃이, 풀밭이나 길가에는 개망초, 토끼풀, 메꽃, 엉겅퀴, 애기똥풀, 괭이밥, 까마중, 기린초, 명아주, 패랭이, 원추리, 벌개미취 등이 핀다. “채송화 봉숭아 그리고 과꽃 장독대의 수국/이른 아침 피었던 나팔꽃도 그렇고/더러는 메꽃도 담 밑에서 가냘펐는데”[이원문, 〈여름꽃〉 중에서].
초여름부터 피는 토끼풀, 꽃창포, 매발톱꽃 등은 7월까지 피고, 개망초, 패랭이꽃, 메꽃, 수련, 엉겅퀴, 원추리, 이질풀, 질경이 등은 8월까지 핀다. 들국화의 하나로 통칭되고 자주색 꽃이 피는 벌개미취도 이 무렵부터 9월까지 핀다. 코스모스와 노란색의 호박꽃은 이 무렵부터 시월까지 핀다. 야산에서는 망종 어간에 밤나무의 가지 끝에 연한 황백색으로 길게 늘어지는 여러 갈래의 수꽃이 다닥다닥 피어 특유의 진한 향기를 풍긴다.
여름에는 뜨거운 햇볕을 견뎌야 하기에 밤꽃을 포함하여 많은 여름 꽃들은 모든 빛을 반사하는 흰색이 많다. 예컨대, 산딸나무, 층층나무, 조팝나무, 노각나무, 치자나무, 함박꽃나무, 으아리, 나무딸기 등의 꽃들은 새하얗다.
그리고 초여름에는 봄에 씨를 뿌리거나 심었던 완두, 상추, 아욱, 우엉, 양파, 마늘, 감자 등의 채소류가 왕성하게 성장해, 그리고 이른 봄에 잎보다 먼저 꽃을 피웠던 나무들이 키워낸 매실, 살구, 자두, 앵두, 버찌, 오디 등의 열매들이 충분히 완숙해, 시장에 출하돼 미각에 새로움을 더하기도 한다. 이처럼 초여름부터는 냉해나 추위의 염려가 전혀 없고 먹이사슬이 잘 작동돼 번식과 성장에 알맞은 철이고 실제로 번식과 성장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시절인 것이다.

이효성 전 성균관대 언론학과 교수·전 방송통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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