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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 르네상스] <40>주막의 회포 

한양경제 2025-02-13 15:44:38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비 내리는 이 밤이 애절구려, 능수버들 태질하는 창살에 기대어,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 앉아서, 따르는 이별주에 밤비도 애절구려,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어도, 못 믿겠소 못 믿겠소 울던 사람아’.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를 풍미한 백년설의 ‘번지 없는 주막’은 ‘주막’을 제목으로 내세운 가요의 대표곡이다.

노래의 첫 구절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이 나라 없는 겨레의 정처없는 현실을 상징하며 식민지 대중의 깊은 공감을 자아냈다. 피폐한 조국 산하를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비유한 작사가의 문학성이 돋보인다. ‘번지 없는 주막’은 ‘나그네 설움’의 서사적 서정적 연장선이다. 나그네의 삶이 있어야 주막의 하룻밤 회포가 있는 것이다. 주막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의 쉼표이다. 

‘번지 없는 주막’은 ‘나그네 설움’과 함께 나라를 잃고 떠도는 망국민의 애환을 구슬프게 토로한 유랑가요의 고전(古典)이다. 두 곡 모두 가수 백년설의 최대 히트곡으로 당대 최고의 애창곡이었다. 노래는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의 처연한 내면 풍경이다. 시대의 나그네가 된 사람들이 하루의 행로를 잠시 멈추고 얼룩진 술잔을 나면서 다시 이별을 예고하며 또 길을 나섰던 것이다. 

능수버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궂은비가 문풍지를 적시는 주막집에 나그네의 객수심(客愁心)도 술잔 속에 침잠했을 것이다. 가물거리는 초롱불 밑에서 맺은 하룻밤의 정을 잊지 못해 기약없는 이별주 한 잔으로 슬픔을 달래던 남녀의 정한이야 오죽했을까. 밤비 소리마저 더욱 처량하여 연인의 심사를 대변했을 것이다. 그것은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대중의 지향없는 삶의 은유이기도 했다. 

주막이란 스쳐가는 역려과객(逆旅過客)이다. 주막에서의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한다. 그러면서도 더러는 하룻밤 풋사랑에 빠져드는 게 고단한 나그네의 정념이다. 그렇게라도 위안을 얻고자 하는 것은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식민지 민중의 불안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그 하룻밤 정분이 또 그리움을 배태하기도 한다. 이래저래 서러운 식민지 나그네의 비애가 주막에 어려 있는 것이다. 

‘와도 그만 가도 그만 방랑의 길은 먼데, 충청도 아줌마가 한사코 길을 막네, 주안상 하나 놓고 마주 앉은 사람아, 술이나 따르면서 따르면서, 네 설움 내 설움을 엮어나 보자’. 1966년 박일남이 남저음으로 부른 ‘충청도 아줌마’는 단골 주막의 아련한 풍정을 떠올린다. 주안상 하나 놓고 길을 막는 사람은 아마도 고향 아줌마일 것이다. 그래서 타향살이의 설움을 서로 엮을 수 있는 것이다.

‘술잔을 들다 말고 우는 사람아, 두고 온 임 생각에 눈물 뿌리며, 망향가 불러주는 고향 아줌마, 동동주 술타령에 밤이 섧구나 밤이 섧구나’. 1970년대의 유행가인 김상진의 ‘고향 아줌마’ 무대는 주막의 현대적 모습인 목로주점이다. 그곳에서 만난 동향의 여인을 통해 떠나온 고향과 가버린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소환하고 있다. 주막집 술잔 위에 띄운 나그네의 시름겨운 망향가이다. 

전쟁의 후유증이 선연하던 1950년대 명국환이 부른 ‘방랑시인 김삿갓’에서 ‘열두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잔에 시 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은 세상이 곧 주막이 아니었을까. 어느 한 곳에도 머물 수 없는 숙명적인 유랑의 행로에서 그가 거쳐간 숱한 주막에는 번지수가 있었을까. 나그네의 삶에 영원한 문패는 없기 마련이지만, 오늘 우리는 번지 없는 주막조차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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