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르네상스] <50> 작곡가 박시춘과 손목인
2025-04-24
가요에도 다양한 꽃들이 등장하며 노래의 서사와 서정을 북돋우는 효과적인 소재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 대중가요에 처음 등장하는 꽃은 ‘물망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가요이자 영화 주제가인 ‘강남달’에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밤을 홀로 새울까‘라는 1절 가사 후반에 나오는 꽃 이름이다. 100년 전인 1920년대 후반에 발표한 옛노래에 ’물망초‘가 나온 까닭이 무엇일까.
4분의 3박자 다장조 왈츠 리듬 형식의 노래 ‘강남달’의 원래 제목은 ‘낙화유수’(落花流水)였다. 영화도 그랬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렸으니 노랫말에 ‘날 잊지 마세요’ ‘진실한 사랑’이란 꽃말을 지닌 ‘물망초’가 필요했을 것이다. 1930년대 고복수가 부른 ‘짝사랑’ 2절 가사에는 ‘들녘에 떨고 섰는 임자없는 들국화’가 있다. 역시 유랑과 상실이란 시대적 감성의 반영이다.
1940년대 초 백년설의 ‘대지의 항구’ 3절에 나오는 ‘유차꽃 피는 항구’는 일제의 대륙 진출 계략에 편승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황량한 만주벌판을 떠돌던 망국민에게 상큼한 정신적 이상향을 대변한 꽃이었을 것이다. 백난아의 노래 ‘찔레꽃’은 아예 제목이 꽃이다. 궁핍하던 봄날에 덤불지어 피던 찔레꽃은 한국인의 애잔한 감성에 잘 어울리는 꽃이다. 그래서 망향의 정서를 상징하는 꽃이기도 했다.
그런데 흰색인 찔레꽃을 붉게 핀다고 해서 논란을 빚기도 했지만, 노래의 무대가 북간도이고 식물명에 대한 분류가 명확하지 못했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시가 있는 꽃을 찔레꽃이라 통칭하며 실향민의 애환을 담았던 것이 아닐까. 일제강점기 마지막 서정곡이었던 남인수의 노래 ‘낙화유수’ 가사 중에 나오는 ‘홍도화’ 또한 세월과 청춘의 무상함을 시사하는 꽃이었다.
광복 후에 나온 사향(思鄕)과 망향(望鄕)의 노래 ‘고향초’에는 ‘동백꽃’과 ‘찔레꽃’이 함께 등장한다. 분단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이촌향도의 시절을 거치면서 ‘고향초’가 더욱 국민 애창곡이 된 것은 ‘동백꽃’과 ‘찔레꽃’에 스민 떠나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의 서러운 감성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비 내리는 고모령’ 2절 가사의 여름꽃 ‘맨드라미’는 물방앗간에서 맺은 ‘시들지 않는 사랑’의 화신인가.
1960년대 이미자의 히트곡 ‘동백아가씨’는 꽃 이름과 주인공이 결합해서 노래 제목이 되었다. 사랑에 속고 기다림에 지친 섬 여인의 한을 빨갛게 멍이 든 동백꽃과 연계한 것이다. 동백꽃은 전쟁의 후유증과 가난의 서러움 속에 붉게 응어리진 외진 서민의 가슴이기도 했다. 화려하게 피었다가 시들기도 전에 봉우리째 떨어지는 비운의 전형, 동백꽃은 그렇게 고달픈 대중의 상처를 붉게 대변했다.
그밖에도 ‘개나리’는 최숙자의 노래 ‘개나리 처녀’에서 봄바람에 흔들리는 이팔청춘 소녀의 가슴을 노랗게 색칠했다. 1980년대 조용필이 열창한 ‘일편단심 민들레’에서 민들레는 변함없는 사랑의 이데아로 거듭났다. 큰 뿌리 하나를 땅 속에 굳게 내려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충절과 오로지 토종 꽃가루 만을 받아들이는 순정의 화신으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조용필의 순애보 절창을 아름답게 장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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