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르네상스] <2> 대중가요와 트로트
2023-10-04
앞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 대중가요 사상 트로트만큼 온갖 부침과 곡절을 다 겪으면서도 변함없는 대중의 인기를 누린 가요 장르도 없을 것이다. 트로트 역사는 과연 애증의 쌍곡선인가?
트로트의 뿌리는 과연 일본일까. 그래서 광복과 더불어 일찌감치 청산했어야 할 일제의 문화적 잔재일까.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트로트’라는 가요 장르와 명칭이 자리를 잡으면서 통용되기 시작한 것부터가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였다.
트로트(TROT)는 ‘빠르게 걷다’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로 1910년대 이후 서양의 4/4박자 사교댄스 스텝이나 연주 리듬 ‘Fox-Trot’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트로트가 일본 열도로 흘러 들어가 일본의 민속음악과 접목하면서 엔카(演歌)가 되었고,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한반도로 상륙해 한국의 민요적 정서와 결합하면서 이른바 트로트가 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트로트란 가요 장르는 서구의 음악과 일본의 엔카와 조선 가요의 혼·융합적 산물인 것이다. 즉 트로트는 서구 음악의 동양식 변형이면서 조선식 변형이기도 하다.
아무튼 일본 엔카의 한국 버전인 트로트가 한반도에 상륙한 것은 1935년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을 통해서였다. 그 후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과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 김정구의 ‘눈물젖은 두만강’ 등과 함께 망국과 실향의 아픔을 달래며 명실공히 대중가요의 주류로 부상한 것이다. 광복 후에도 트로트는 청산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혼란과 좌절의 시대 정서를 대변하며 연착륙했다.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트로트는 부활을 거듭했다. 6·25전쟁 당시에도 ‘전선야곡’과 '단장의 미아리고개' '굳세어라 금순아' 등 숱한 명곡을 탄생시키며 전쟁의 고통과 이별의 아픔을 어루만졌다. 5·16 군사정부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던 1960년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로 다시 선풍을 일으키던 트로트는 동시에 '왜색'으로 몰리면서 무더기로 금지곡 신세가 되는 파란도 함께 겪었다.
1970년대 들어 포크송을 앞세운 청년문화의 열기로 잔뜩 위축되었던 트로트는 ‘오동잎’ ‘돌아와요 부산항에’ ‘사랑만은 않겠어요’ 등의 '트로트 고고'로 변신하며 흥행을 이어갔다. 1980년대 약사 출신 가수 주현미의 '메들리 붐'으로 후끈하게 달아오른 트로트는 한편으로는 '뽕짝'이라는 비속어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트로트는 여세를 몰아 ‘전통가요’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트로트의 ‘국적 논쟁’이 벌어진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국악계의 어느 명인이 ‘누가 뽕짝을 우리 것이라 우기느냐’는 글로 불씨를 일으키면서 트로트 국적 논란과 왜색 시비가 음악계 전체의 논쟁으로 일파만파 번져나간 것이었다. ‘일본 음악산업의 상업주의가 양산한 제국주의의 찌꺼기’라는 혹독한 비난에 대해 ‘뽕짝의 원류는 한국’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되며 논쟁은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음악대학 교수와 음악평론가 그리고 작곡가 등 전문가들이 합세하며 반박과 재반론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일본 쇼와시대 유행가의 음계가 뽕짝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분석에 대해 ‘왜색이라는 7․5조가 고려가요에 이미 존재했으니 뽕짝이 우리 것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다’는 주장도 나왔다. ‘대중이 오랜 세월 사랑해 온 노래를 이제 와서 일본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우리 문화의 미숙한 탓’이라는 탄식도 있었다.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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