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르네상스] <50> 작곡가 박시춘과 손목인
2025-04-24
매스미디어가 발달하지 못했던 일제강점기의 유행가는 악극단 공연을 통한 전달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공연 또한 가수 한 사람의 무대인 현대의 콘서트와는 달리, 연극의 막간이나 악극의 중간에 등장하는 노래가 전부였다. 이애리수, 김연실, 신카나리아 등 당대의 인기 가수들도 그랬다. 모두 악극단 소속으로 연기를 함께 하는 배우였거나, 막간에 나와 노래를 부른 예인(藝人)들이었다.
그런 공연에서 인기를 얻은 노래가 음반 취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근대 이후 대중 매체와 상업적 공연을 통해 전달된 나름의 작품적 관행을 지닌 서민 대중의 노래를 대중가요라고 정의했을 때,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를 ‘희망가’로 보는 견해가 많다. 당시에는 노래 제목이 가사의 첫 구절을 따서 ‘이 풍진 세월’이었던 ‘희망가’는 그러나 외국곡에 누군가 가사를 붙인 것이었다.
세칭 ‘현해탄 정사(情死)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사의 찬미’ 역시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곡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노랫말을 단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작사․작곡한 최초의 대중가요는 1929년에 나온 영화 주제곡이었던 ‘강남달’이었다. 당시에는 이 노래가 영화 제목인 ‘낙화유수’로 통용되었다. 애초에 ‘황성의 적’이라는 제목으로 유행한 ‘황성옛터’와 ‘타향살이’ 등은 3박자 왈츠 리듬에 가까웠다.
이른바 본격적인 트로트 곡으로 선풍적인 대중의 인기를 모은 최초의 대중가요는 ‘목포의 눈물’이었다. 그 뒤를 ‘애수의 소야곡’ ‘번지 없는 주막’ ‘나그네 설움’ ‘눈물 젖은 두만강’ 등의 트로트 명곡들이 이어 나갔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나온 대표적인 가요 장르였던 트로트의 가사는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면서 망국의 설움과 실향의 아픔을 토로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시절을 대변한 트로트 가요의 정서는 ‘상실’과 ‘방랑’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등장한 트로트는 밝은 느낌의 장조 음악보다는 애잔한 분위기의 단조 선율이 더 많았다. 하지만 트로트는 대중의 암울한 현실에 침잠(沈潛)하기보다는 비애의 눈물과 더불어 겨레의 애환을 달래고 아픔을 승화시키는 역할을 많이 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0년대에는 그나마 꽃을 피우기 시작하던 대중가요에 어두운 그림자가 뒤덮였다. 일제가 전시 동원 체제를 가동하면서 문화예술 전반에 노골적인 친일을 강요했던 것이다. 애잔한 단조의 멜로디로 망국민과 실향민의 심금을 울렸던 트로트가 장조의 노골적인 친일가요로 대체된 것이다. 만주를 소재로 한 가요들과 가요인들이 떠안아야 했던 친일 성향도 그렇게 대두되었다.
경쾌한 리듬과 희망적인 가사로 이국땅을 표류하던 한민족의 심신을 어루만져 준 ‘대지의 항구’도 친일의 굴레를 쓸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만주 이민정책을 미화한 영화 ‘복지만리’의 삽입가였기 때문이다. 황폐한 시절, 가수들은 물론 작사‧작곡가들도 군국주의 홍보에 동원되었다. 수탈과 유린의 정점에서 조선인들은 트로트 가요라도 부르며 스스로를 달래야 했다. 모두가 ‘식민지 나그네들’이었다.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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