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성의 자연에세이] <28> 식목과 우리 조상의 지혜
2025-04-14

5월은 늦봄으로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이행하는 시기다. 4월까지만 해도 흔히 보이던 어지럽던 봄바람도, 꽃을 시샘하던 꽃샘추위도, 5월이 되면 거의 사라지고 날씨가 안정되어 온도가 오르면서 계절이 여름으로 점점 바뀌어 간다. 한반도에서는 북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남동계절풍과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북서계절풍의 치열한 공방전이 입춘 어간부터 시작되어 대체로 4월까지로 끝나고 5월부터는 남동계절풍이 지배하게 된다.
이처럼 5월부터 북태평양의 고온다습한 바람이 계속 불어오는 데다 낮이 길어진 탓에 복사열마저 많아져 기온이 크게 올라 더워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5월의 날씨는 여름 날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지구의 온난화로 여름이 길어지는 탓인지도 모른다. 절기력은 5월 5일 경에 여름에 들어선다는 ‘입하(立夏)’ 절기를 두고 있다. 이때 이팝나무가 하얀 꽃으로 뒤덮이는데 본래 입하 무렵에 핀다하여 입하목(立夏木)이라 부른 데서 연유한 이름이다.
5월부터 지상은 명실공히 잎파랑이 또는 엽록소(葉綠素)의 천하임이 드러난다. 5월에 지상은 잎들에 의해 거의 빈틈없이 메워지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따뜻한 대기 속에서 참신하고 싱그러운 잎들의 녹색 향연이 펼쳐진다. 따뜻한 날씨와 싱그러운 녹색 물결은 5월이 ‘계절의 여왕’으로 불리고 ‘가정의 달’이기도 하며, 5월제(메이데이, May Day) 및 노동절(1일),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스승의날 및 가정의날(15일) 등 기념일 많이 있는 이유다.
5월 20일경에 만물이 자라 가득 찬다는 ‘소만(小滿)’ 절기가 있다. 게다가 풀잎이든 나뭇잎이든 아직은 연초록이고 벌레도 타지 않은 때여서 참으로 깨끗하고 신선하기 그지없다. 4월부터 나기 시작한 어리고 여린 연둣빛 잎들이 5월에는 햇빛의 세례를 받고 자라면서 연초록으로 변한다. 그랬다가 잎들이 대체로 다 자라고 햇빛이 훨씬 더 강렬해지는 6월 초순 어간부터는 진초록으로 변해 싱그러운 모습이 사라지지만 그만큼 세상은 잎파랑이의 천하임이 더욱 분명해진다.
5월에 들어서면, 지상은 풀잎과 나뭇잎들에 의해 연녹색으로, 하늘은 간간히 흘러가는 흰 구름을 안고 파란색으로, 대조를 이룬다. 그 푸른 풀밭과 하늘을 수직으로 오르내리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쉼 없이 지저귀는 새가 있다. 바로 유라시아 대륙의 북위 30도 이상의 지역에 흔한 텃새인 종달새다. 노고지리라고도 부르는 종달새는 흔하기도 하지만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내려오며 계속 지저귀는 특성으로 인하여 시나 노래에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친근한 종달새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다. 농약의 남용 탓이다. 그래서 종달새는 보호조가 되었다. 종달새의 희귀화에서 환경보호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5월 어간에는 풀들이 한반도의 산과 들을 가득 메우는데 그 풀들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나물들이 많다. 그래서 오랜 역사를 가진 한국인들은 먹을 수 있는 많은 나물들을 가려내고,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발전시켰으며, 채식을 주로 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 전 세계적으로 한국인처럼 갖은 나물들을 갖은 방법으로 요리하여 자주 그리고 많이 식용하는 민족은 없을 것이다. 나물은 이른 것은 3월부터 캘 수 있지만 본격적인 채취는 5월 어간에 이루어진다. 나물의 몇 가지 예를 들면, 들나물로는 냉이, 달래, 쑥, 광대나물, 돌나물, 고들빼기, 원추리 등이 있고, 산나물로는 참나물, 더덕, 고사리, 고비, 참취, 곰취, 삽주, 두릅 등이 있다.
과거 이 무렵은 쌀과 같은 묵은 곡식은 남아 있지 않고 보리와 같은 새 곡식은 아직 나지 않아 배를 곯아야 하는 보릿고개 또는 춘궁기(春窮期)였다. 이러한 보릿고개를 무사히 넘기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은 바로 나물이었다.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한 나물은 가난했던 옛 시절에 아주 훌륭한 구황식품이었다. 우리 선조들에게 나물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지방마다 전해오는 ‘나물타령’의 존재에 의해 증명된다. 오늘날에도 나물들은 계절의 미각을 돋우는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5월에는 아까시나무, 등나무, 오동나무, 쪽동백나무 등의 향이 강한 나무꽃들과 함께 귀룽나무, 층층나무, 산사나무, 쥐똥나무, 팥배나무, 때죽나무, 마가목, 산딸나무, 함박꽃나무 등의 하얀 꽃과 장미과의 황매화, 덩굴장미, 찔레꽃, 해당화, 모과나무 등의 꽃들이 핀다. 원산지가 한국인 오동나무는 잎이 커서 빨리 자라지만 목재가 단단하고 무늬가 아름다워 가구용 소재로 많이 쓰인다. 그래서 과거 우리 조상들은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출가목(出嫁木)으로 심어서 딸이 시집갈 때 그 오동나무를 베어서 장롱을 비롯한 혼수용 가구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않고 속은 비었으나 곧게 자라기 때문에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온 대나무는 각종 제품을 만드는 데 많이 사용되어 그 실용성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대나무의 실용성은 그 어린 싹인 죽순의 식용에도 있다. 죽순은 흔히 4월 중순부터 6월 하순까지 자라는데 대체로 5월에 가장 많이 올라온다. 그런데 한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가 이때만은 그 푸름을 잃고 누르스름해진다. 이는 어미 대가 급격히 자라는 죽순에게 자신의 양분을 양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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