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르네상스] <50> 작곡가 박시춘과 손목인
2025-04-24
긴 여정 먼 발자취를 남기고 내게로 다가온 바람 바람아! 스물셋 미당 서정주 시인의 팔할을 키운 바람아. 윤동주 시인의 고뇌와 아픔으로 잎새에 일던 바람아. 정녕 사람의 감성을 흔드는 그 바람의 원천은 무엇인가.
그 의문표에 바람은 시와 노래로 화답했다. 전쟁의 혼란 속에 탄생한 노래 ‘봄날은 간다’에서 연분홍 치마를 휘날리게 한 봄바람은 가는 봄의 탄식을 품었다. 너무도 화사해서 더 슬픈 봄날의 역설을 바람은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속절없는 체념적바람의 정서가 세파에 지친 마음을 더 위로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김소월의 시구(時句)처럼 ‘실버들 천만사 늘여놓고도’ 잡지 못하는 달관의 상념인가.
1960년대 중반 가난과 질곡의 삶을 이어가던 서민들의 ‘못 견디게 그리워도 울지 못하는’ 심정을 대변했던 이미자의 노래가 ‘울어야 열풍아’였다. 당시는 가부장적 인 사회로 특히 여성들은 아파도 슬퍼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말 못할 가슴 속 상처를 대변하던 정서적 변주가 바로 열풍이었다. ‘열풍’(熱風)일 수밖에 없었다.
박일남이 부른 ‘갈대의 순정’에서 사나이의 마음을 은유한 갈대를 흔든 것도 바람이었다. 정치적 혼란과 부박한 시정에 휩쓸리던 기회주의적 남심(男心)을 갈대에 비유한 것일까.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애련에 흔들리는 은빛 물결을 대변한 남저음 선율, 이 또한 바람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자연과 인정의 형상화일지도 모른다. 흔들리는 것은 모두 바람의 탓이려니….
가수 조용필은 ‘바람의 노래’에서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이라고 물음표를 던진다. 그리고 만남과 이별, 성공과 실패의 시간들이 바람임을 시사한다. 남진의 노래 ‘나야 나’ 첫 구절 ‘바람이 분다, 길가에 목로집, 그냥 가긴 서운하잖아…’에서 저물녘 퇴근길 발걸음을 목로집의 한 잔 술로 이끄는 것도 바람이다.
‘길을 걷는다 / 끝이 없는 이 길 / 걷다가 울다가 / 서러워서 웃는다 / 스치듯 지나는 바람의 기억보다 더 / 에일 듯 시리운 / 텅 빈 내 가슴…’
장윤정의 ‘바람길’은 울림이 있는 서정시의 낭송과 같다. ‘바람길’은 소녀 트로트 가수 김태연의 창법으로 다시 주목을 받았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낯선 바람 바람아/ 덧없는 한 세상 답답한 마음을/ 너는 달래주려나…’
미스트롯 스타 정서주가 부른 신곡 ‘바람 바람아’도 그렇다. 파란 많은 삶에서 상처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감싸주는 노래이다. 바람은 나를 달래는 주는 객체이면서, 어느새 내가 바람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세상이 바람이고 나도 바람인 것이다. 열다섯 살 소녀 가수의 청아하면서도 포근한 음색에 실린 노랫말에 사람들이 공감하고 공명하는 까닭이 있다.
바람의 시원은 삶의 근원과도 같은 것인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드는 물리적인 현상이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감성이기도 하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도, 흔들리지 않고 지는 꽃도 없다. 인생도 그렇다. 바람의 노래가 심금을 울리는 까닭이다.
이른 봄날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도 꽃샘바람의 노래인 것이다.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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