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를 선도하는 '경제 나침반'

[트로트 르네상스]<19> 민주화의 정한(情恨)을 노래하다

부패·장기 집권 종식 기회 잃은 아쉬움
‘비 내리는 호남선’·‘유정천리’·‘허공’
민주화 갈망 담은 민중의 마음이 선율로
한양경제 2024-05-28 18:04:46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다시 못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는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트로트 ‘비 내리는 호남선’은 지금도 TV 방송 프로그램이 가끔씩 소개하는 사랑과 이별의 정서를 담은 옛노래이다. 그런데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56년에는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리면서 본의 아니게 정치 풍자가요가 되어버렸다. 

당시 자유당의 부패와 장기 집권 기도에 염증을 느낀 민심은 민주당이 내세운 신익희 후보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눈앞에 다가선 듯했다. 그런데 선거를 열흘 앞둔 5월 5일 호남 유세를 위해 열차에 올랐던 신익희가 뇌일혈(뇌출혈의 옛말)로 쓰러져버린 것이었다. 민주화의 열망은 무너졌고 흉년의 빈 들녘같이 스산한 대중의 가슴에 스며든 노래가 ‘비 내리는 호남선’이었다. 

노래는 신익희의 추모곡으로 민중의 위로곡으로 승화되며 널리 퍼져나갔다. 신익희가 암살되었고 가사를 부인이 썼다는 가짜 뉴스들이 양산되었다. 가수 손인호와 작곡가 박춘석, 작사가 손로원이 수사기관에 불려가 취조를 당하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그렇게 ‘비 내리는 호남선’은 한국 대중가요사상 처음으로 정치적 후폭풍 속에 대중의 감수성을 반영한 가요로 대(大)히트하는 기록을 남겼다. 

왜 하필이면 ‘호남선’, 그것도 ‘비 내리는 호남선’이었을까? 1950년대 후반 한국 사회를 풍미했던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설움을 대변한 ‘목포의 눈물’을 계승하고 ‘대전 블루스’로 승화되며 호남선과 목포행 열차에 회한과 눈물을 실었다. 우리 정치사는 불행하게도 4년 뒤인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또 하나의 정치 풍자가요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4·19 혁명의 서곡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생길은 몇 구비냐, 유정천리 꽃이 피네 무정천리 눈이 오네.’

1959년 박재홍이 부른 ‘유정천리’의 2절 가사 뒷부분은 그 자체로 잇따라 정치 지도자를 잃고 좌절의 늪에 빠진 민중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유정천리’는 원래 전란 후 피폐한 도시적 삶에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꿈꾸는 서민의 고달픈 삶을 투영한 시절 가요였다. 이 노래가 또 정치적 파란과 마주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2·28 민주운동을 주도한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유정천리’의 가사를 바꿔 부르며 거듭되는 정치적 불운에 상심한 민심에 호소했다.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야당이었던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가 미국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노래는 부정선거를 획책하는 자유당 정권을 풍자하고, 민중의 허탈감을 대변하며 많은 국민들에게 전파되었다. 대중가요가 품은 시대성과 역사성이다.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1980년대 중반 조용필의 히트곡 ‘허공’도 정치적 격랑과 비극 속에 탄생한 트로트 곡이었다. 1979년 10월 유신정권이 붕괴하면서 이른바 ‘서울의 봄’이 다가왔지만 신군부의 등장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작사·작곡가 정풍송은 그 허망하고 참담한 심정을 ‘허공’이라는 제목의 노래에 담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전 검열을 피해 당초 가사 속에 있던 ‘민주’를 ‘그대’로 바꾸면서 노래는 사랑 타령으로 변했다. 그러나 ‘설레이던 마음도 기다리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 만 될’ 국민의 울분과 정한을 조용필의 가창력으로 토해내며 노래는 이심전심 국민가요로 부상했다. 그것은 민주화를 갈망하던 국민의 통곡이기도 했다. 대중의 심리와 어우러졌을 때 가요 노랫말의 은유와 비유가 발휘하는 위력이다.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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