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를 선도하는 '경제 나침반'

[트로트 르네상스]<26> 철도에 실은 트로트

식민지 수탈·피란민·산업화 상징하는 기찻길
피난살이 마침표를 노래한 ‘이별의 부산정거장’
한류 품고 대륙으로 나아갈 새 시대의 철도
한양경제 2024-09-10 14:02:18
철도는 인류가 발명한 획기적인 문명의 이기(利器)이지만 우리에게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어두운 시대적 산물이었다. 오로지 ‘식민지 경영’을 위한 군사적 팽창과 산업적 수탈의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철도는 이 땅의 귀중한 물자들을 빼앗아 갔고 소중한 사람들을 싣고 떠나버린 상실과 이별의 냉혹한 운송수단이었다. 한국의 철도에 만남의 기쁨보다는 이별의 눈물이 더 흥건이 배어있는 까닭이다. 

숱한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만주로 이동한 것도, 젊은 청년들이 ‘지원병’이란 미명으로 전쟁터로 끌려간 것도, 꽃다운 처녀들이 위안부로 붙잡혀 떠난 것도 철도역이 시발이었다. 그래서 우리 현대사에서 철도는 희망의 청사진보다는 절망의 실루엣이 드리워져 있기 마련이었다. 해방 후에도 6·25전쟁기의 철도는 피란민의 눈물이, 1960년대 이후 산업화 시대에는 이촌향도의 아픔이 배어있었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란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 

남인수가 열차 바퀴 구르는 듯한 금속성 목소리로 부른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6·25 전쟁으로 비롯된 피란살이의 마침표였다. 서울로 돌아가는 설렘과 희망의 정서가 깃들어 있지만 제목이 시사하듯 떠나가는 이별의 정한이 더 짙다. 

비탈진 국가의 운명과도 같았던 바닷가 판자촌에서 피란살이의 애환과 설움도 많았지만 경상도 사투리와 아가씨의 순정은 잊을 수 없었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은전란 속의 유랑과 여로의 종착역에서 탄생한 명곡이었다. 그래도 휴전협정이라는 전쟁의 일단 정지에서 서울로 귀환하는 열차의 리듬은 경쾌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트로트가 식민지 시대의 탄식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울림이기도 했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 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 

왜 하필이면 ‘비 내리는 호남선’(1956년)인가. 영호남 지역감정이 없던 자유당 시절에 나온 호남선의 이별가와 피눈물이 1970~80년대 광주와 호남의 한숨과 비극을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 철도와 역에 어린 호남의 눈물은 3년 후에 나온 ‘대전 블루스’와도 상통한다. 

이 또한 ‘대전발 영시 오십분’ ‘목포행 완행열차’이다. 안도현 시인이 ‘밤에 전라선을 타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던 이유를 알만하다. 모름지기 기차역이란 이렇게 이별의 서정을 머금고 있다. 나훈아의 ‘고향역’은 이촌향도의 산업화 시대인 1970년대 한국 사회의 망향가이다. 고향 떠나 도시로 떠나온 사람들이 꿈 속에라도 달려가고 싶었던 그리운 공간이었다. 

‘녹슬은 기찻길’은 6·25 전쟁의 상흔을 웅변한다. 휴전협정 19년째 핏빛으로 녹슬어 있는 기찻길을 통해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소망을 대변했다. ‘안동역에서’는 2000년대의 트로트 곡이다. 그리고 노래방에서 뜬 대표곡이다. 전라도 가수 진성은 경상도 역 노래 한 곡으로 긴 세월의 가난과 무명의 터널에서 벗어나 정상에 올랐다. 기차역은 이렇게 그립고 간절한 날들의 출발점이자 마침표였다.

육중한 차체를 짊어지고 일정한 궤도 위를 달려가는 열차는 숙명적인 인생행로를 떠올린다. 그 열차의 시작과 마무리는 다름아닌 역(驛)이다. 이제는 일제의 식민통치로 비롯된 철도에 대한 저항 의식도 편리한 일상의 교통수단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우리나라 산업화의 대동맥 역할을 한 데 이어, 남북을 잇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며 한류를 품고 유럽으로 나아가는 낭만의 기찻길이 되기를 소망한다.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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