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자급률이 100%에 가까운 일본이 최근 한국산 쌀을 소비자 판매용으로 수입하는 이례적 상황에 직면했다. 지난해 여름부터 일본 내 쌀값이 급등하면서, 지난 4월 한국산 ‘땅끝햇살’ 브랜드 쌀 2t이 일본에 수출돼 판매됐다. 관련 통계가 있는 1990년 이후 최대 물량이다.
10㎏당 약 9,000엔이라는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일본산 쌀보다 저렴하다는 인식이 퍼지며 열흘 만에 품절됐다. 농협은 10t을 추가로 선적했고, 다음 달 10t 수출도 추진 중이다. 총 22t 규모의 수출이다.
한일 양국은 모두 자포니카 계열의 찰진 쌀을 주식으로 소비한다. 자급률도 높아 쌀 과잉이 더 큰 고민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이 수급 불균형을 겪고 한국산 쌀을 들여온 데는 기후변화, 외식 수요 증가, 정책 전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구조적인 원인은 유통 시스템에 있다.

민간 경매 의존, 가격 교란 자초
일본의 쌀 유통은 민간 경매 중심의 다단계 구조다. 생산 농가에서 도정업체로 옮겨진 쌀은 민간 경매장을 거쳐 도매업체와 소매업체로 흘러간다. 이 과정에서 실시간 경매로 가격이 결정된다.
문제는 경매 시스템이 대형 유통업체에 유리하게 작동한다는 점이다. 일부 유통업체가 고가 낙찰을 통해 물량을 선점하면, 중소 소매업체는 쌀을 확보하기 어렵다. 가격은 왜곡되고, 시장 혼란이 커진다.
쌀을 제때 확보하지 못하는 지역에서는 소비자 불안이 커지며 사재기로 이어진다. 유통업체가 이 불안을 이용해 물량을 묶어두면 가격은 더 오른다. 이 구조는 농가 → 도정업체 → 민간 경매 → 도매상 → 대형 유통업체 → 소비자로 이어진다. 중간 단계마다 이윤이 붙고, 가격 통제 여지도 커진다.

생산은 공공, 유통은 민간…엇갈린 시스템
일본 정부는 오랜 기간 농가 보호를 중심으로 한 감산 정책을 펴 왔다. 1970년대 시작된 이 정책은 쌀 생산을 줄이고, 사료용 곡물이나 채소 재배로의 전환을 유도했다. 2018년 감산 제도는 폐지됐지만, 품목 전환 보조금 형태로 사실상 지속되고 있다.
반면 유통은 철저히 민간에 맡겨졌다. 도정, 경매, 판매 전 과정이 민간 주도로 이뤄지고, 공공 개입은 없다. 가격 형성은 민간 경매 결과에 좌우된다.
나카지마 다카후미 일본 농업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쌀 유통이 민간 경매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구조는 공공재인 식량의 안정성과는 거리가 멀다”며 “대형 유통업체가 가격을 주도하는 구조에서 소비자는 늘 불안한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은 농협 중심 일원화 구조
한국은 농협 중심의 통합 유통 시스템을 운영한다. 대부분의 농가는 지역 농협 산하 미곡종합처리장(RPC)에 쌀을 출하하고, 이곳에서 도정·포장·저장을 거쳐 하나로마트, 온라인몰, 대형 유통망으로 공급된다.
가격은 정부 수매가와 농협 계약 가격을 기준으로 형성되며, 민간 경매에 의존하지 않는다. 유통 구조가 단순하고 투명해 시장 교란 가능성이 적다. 정부는 필요시 비축미 방출이나 수매 확대를 통해 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

기후변화, 관광객 급증은 일시적 변수
일본 쌀값 급등의 계기로는 기후 요인이 꼽힌다. 2023년 여름, 기록적 폭염으로 주요 품종인 고시히카리의 품질과 수확량이 크게 떨어졌다. 올해도 이상고온이 예상되자 소비자들은 조기 구매에 나섰다.
외국인 관광객 급증도 외식업 중심으로 쌀 소비를 늘렸다. 일부 지역에선 지진 대비 사재기 수요가 발생했다. 일본 정부는 21만t 규모의 비축미 방출 계획을 발표했으나 시장 불안은 가시지 않고 있다.
총무성에 따르면 4월 중순 기준, 일본 쌀값은 5㎏당 평균 4,214엔으로 14주 연속 상승 중이다. 1㎏당 1,000엔을 넘는 제품도 등장했다.
쌀은 충분히 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시장에 제때 공급되지 않으면 소비자에게는 ‘없는 쌀’이 된다. 유통이 막히면 가격은 왜곡되고, 소비자는 불안에 빠진다. 생산자는 제값을 받지 못한다.
김세훈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은 농협이 수매부터 도정까지 일괄 관리해 가격 안정 효과를 거두고 있다”며 “일본도 장기적으로는 공공 중심 유통망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은 매년 WTO 체제 아래 의무수입쌀(MMA) 할당 문제로 논란을 겪는다. 수입된 쌀은 자급률이 높은 일본에서 소비되지 못하고, 보관되거나 폐기된다. 공급 과잉의 상징이던 일본이 이번엔 역설적으로 공급 부족 사태를 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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