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르네상스] <49> 남진과 나훈아
2025-04-17
이루지 못한 사랑을 노래한 불멸의 세레나데 ‘애수의 소야곡’은 남인수를 일약 가요 황제로 등극시키며 박시춘 또한 최고의 작곡가로 입지를 굳혔다. 박시춘-남인수 콤비의 첫 성공작으로 한국 가요사의 서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다. 광복 후에는 낭만가요 ‘신라의 달밤’과 ‘럭키 서울’로 광복의 기쁨을 노래했다. ‘신라의 달밤’은 독특한 발성과 서구적인 풍모의 스타 가수 현인의 데뷔곡이다.
분단의 아픔을 ‘가거라 삼팔선’에 담은 박시춘의 역량은 전시(戰時)에 더욱 빛이 났다. 6.25전쟁기를 풍미한 진중가요 ‘전우야 잘자라’와 불멸의 전쟁가요 ‘전선야곡’, 피란민과 실향민의 비애를 그린 ‘굳세어라 금순아’, 전란 속 화려한 봄날의 역설을 음유한 ‘봄날은 간다’, 전쟁의 종점에서 피란살이의 정한과 환도(還都)의 희망을 경쾌한 리듬으로 읊은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숱한 명곡을 쏟아냈다.
박시춘은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과 광복의 환희를 주목했으며, 분단과 전쟁의 아픔은 물론 전란이 휩쓸고 간 폐허 위에서 선 대중의 좌절과 희망을 공감했다. 격동의 시대 굽이굽이마다 국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노래를 통해 위로하고 응원했던 것이다. 박시춘의 음악은 서정적인 멜로디는 물론 ‘왕서방 연서’ ‘세상은 요지경’ 같은 만요에서 신민요와 서구적인 리듬에도 이른다.
시절의 감성을 절묘하게 표현하며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져 준 박시춘은 작곡뿐만 아니라 공연 활동과 레코드 회사와 영화사도 운영하며 영화 주제가 시대를 열기도 했다. 음악저작권협회와 한국가요작가협회 등을 이끌며 대중음악인들의 권익보호 활동에도 앞장섰다. 그의 음악성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다. 한국인의 정서에 누구보다 충실했던 박시춘이 남긴 대중문화의 유산은 실로 위대하다.
박시춘과 더불어 한국 가요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작곡가는 손목인이다. 1913년생으로 박시춘과 동갑인 손목인은 일본에서 작곡을 공부하던 중 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했다가 우연한 기회에 겨레의 망향가인 고복수의 노래 ‘타향살이’를 작곡했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OK레코드 사장이 문예부장 김능인이 쓴 가사를 들고 왔길래 곡을 붙인 것이다.
‘타향살이’ 이듬해인 1935년에 작곡한 이난영의 노래가 비련의 정조와 민족의 비애를 담은 불멸의 히트곡 ‘목포의 눈물’이다. 오케레코드사에서 악단을 편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아코디언 연주자인 손목인은 고복수와 콤비를 이뤄 망향과 상실의 한을 토로한 국민가요 ‘짝사랑’을 만들었다. 해방 후 심연옥의 ‘아내의 노래’, 1960년대 오기택의 ‘아빠의 청춘’과 최숙자의 ‘모녀 기타’ 등 많은 명곡을 남겼다.
섬세하고 감각적인 박시춘의 선율에 비해 손목인의 리듬은 보다 선이 굵고 남성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박시춘과 손목인은 대중가요 1세대 작곡가로 우리 대중음악사의 근간(根幹)이다. 시대의 현실을 반영하고 서민의 감성을 대변했던 국민 애창곡들이야말로 오늘날 한류의 뿌리이기도 하다. 두 사람 모두 일제 말기 친일 가요 제작의 얼룩을 남기기도 했지만, 우리 대중음악사의 거목임을 부인할 수 없다.

댓글
(0) 로그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