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르네상스] <52> 탄로가(嘆老歌)
2025-05-08
비포장 도로가 많았던 과거에는 대부분의 가로수가 버드나무였고, 마을 어귀마다 버드나무 한 두 그루 없는 곳이 없었다. 그만큼 흔한 나무였으니 추억의 배경이 되었고 시가(詩歌)에도 자주 인용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버들가지의 서정성은 문인묵객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예로부터 유랑과 망향 그리고 사랑과 이별의 노래에 버드나무가 빠지지 않는 까닭이다.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버들피리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고복수가 부른 겨레의 망향가 ‘타향살이’ 3절 가사에 버드나무와 버들피리가 등장한 것도 같은 이치이다. 식민지라는 타향의 시대에 버드나무는 떠나온 고향과 잃어버린 조국의 상징이었다. 망국과 실향의 아픔을 안고 떠도는 사람들의 심사를 달래주던 국민 애창곡 ‘번지 없는 주막’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지없이 바람에 나부끼는 버드나무가 노랫말을 장식하고 있다. ‘능수버들 태질하는 창가에 기대어, 어느 날짜 오시겠오 울던 사람아’. 궂은비 내리는 봄날 저녁, 이별의 술잔이 서러운 주막집 마당 가장자리에 선 수심(愁心) 가득한 버드나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문패도 없는 주막에서 나그네 서정에 흠뻑 젖은 버들가지인들 여울져 흐르는 판소리 가락처럼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버들잎 외로운 이정표 밑에, 말을 매는 나그네야 해가 졌느냐...’ 일제의 수탈과 유린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 이국땅을 표류하던 망국민의 심신을 어루만져준 ‘대지의 항구’에서 버들잎은 유랑민의 오아시스였다. 황량한 만주벌판을 떠도는 조선인들에게 버들잎은 고향마을 우물에서 길어 올린 청량한 물 한모금과 같았다. 풍랑에 시달리는 지친 나그네 길에 버들잎은 정신적인 항구였는지도 모른다.
신민요 ‘노들강변’에서 봄버들은 무정 세월을 동여매려는 도구의 역할을 했고, ‘나는 열일곱살’에서 버드나무 아래는 두근거리고 울렁거리는 17세 소녀가 임을 만나고 싶은 공간으로서 기여를 했다. ‘실버들을 천만사 늘여놓고도,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 이내 몸이 아무리 아쉽다기로, 돌아서는 임이야 어이 잡으랴, 한갓되이 실버들 바람에 늙고, 이내 몸은 시름에 혼자 여위네...’
돌아서는 임을 가는 봄에 비유하며 그 붙잡고 싶은 절절한 마음을 이토록 절묘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천만 가닥의 실버들과 천만 개의 손이 있은들, 가는 임과 봄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사랑과 세월의 무상함을 읊은 김소월의 시 ‘실버들’은 1970년대 후반 인순이가 노래로 불렀다. 광복 후 분단과 전쟁의 후유증을 앓고 있던 대중의 신산한 삶을 위무해준 것은 가을의 오동잎이었다.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오동추야’(梧桐秋夜)는 오동나무 잎이 떨어지는 가을밤이다. ‘오동동’(梧桐動)은 오동나무 잎의 흔들림이다. 그것이 ‘동동주 술타령’ ‘독수공방 타는 간장’ ‘사공의 뱃노래’ ‘기생의 장구소리’ 등과 어우러지며 고단한 생활 속의 낭만 정서를 점입가경으로 버무려 냈다. 신민요의 ‘오동잎’은 트로트고고 시대를 개막한 최헌의 ‘오동잎’에서도 가을의 고독한 정취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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