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르네상스] <54> 소야곡의 정한
2025-05-22
‘서울 어느 하늘 아래, 낯설은 주소인들 어떠랴, 아담한 집 하나 짓고, 순아 단둘이 살자, 깊은 산 바위 틈, 둥지 속에 산비둘기처럼, 우리 서로 믿고, 순아 단둘이 살자...’ 1978년 최헌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부른 ‘순아’는 장만영 시인의 ‘사랑’이란 시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순아’는 누이 같고 연인 같고 아내 같은 평범한 이름이지만, 노래의 정서로 미뤄보더라도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름이 분명하다.
‘내 곁을 떠나간 그 사람 이름은, 자옥 자옥 자옥이었어요, 그 사람 어깨엔 날개가 있어, 멀리 멀리 날아갔어요, 자옥아 자옥아, 내가 내가 못 잊을 사람아, 자옥아 자옥아, 내가 정말 사랑한 자옥아...’ 2002년 트로트 가수 박상철이 부른 ‘자옥아’는 김소월의 ‘초혼’을 연상할 만큼 애절한 감성을 담고 있다. 도대체 여기서 ‘자옥아’는 누구일까. 박상철은 탤런트 김자옥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열창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자옥의 남편인 선배 가수 오승근에게 “왜 남의 아내 이름을 함부로 외쳐대느냐”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는 우스갯 소리도 전한다. 아무튼 박상철은 어릴 때부터 김자옥이 우상이었다고 하니 사모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또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되는 것인가. 2004년 설운도가 부른 ‘춘자야’는 뜻밖에도 선배 가수 남진의 첫사랑 목포 여인의 이름이다.
‘춘자야 보고 싶구나, 그 옛날 선술집이 생각나구나, 목포항 뱃머리에서 눈물짓던 춘자야, 그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는지, 이 밤도 네가 무척 보고 싶구나, 나를 따라 천리만리 간다던 그 사람, 어느덧 세월만 흘러갔구나, 내 사랑 춘자야, 꼭 한 번 만나야 할 내 사랑 춘자야’. 설운도는 남진의 첫사랑 얘기를 듣고 이 노래를 작곡했는데, 가사는 자신의 아내인 이수진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희미한 불빛 아래 마주 앉은 당신은,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고향을 물어보고 이름을 물어봐도, 잃어버린 이야긴가 대답하지 않네요, 바라보는 눈길이 젖어 있구나, 너도 나도 모르게 흘러간 세월아,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물어도 대답없이 고개 숙인 옥경이’. 태진아의 노래 제목 ‘옥경이’는 자신의 아내 이름 이옥형을 차용한 것이다. 편하게 부를 때 ‘옥경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주인공은 작사가 조운파의 지인이 서울 서대문 어느 살롱에서 만난 고향 여인이었다. 그 사연이 ‘고향 여자’라는 노랫말이 되고 작곡가 임종수가 곡을 붙였는데, 나훈아가 불러만 보고 음반을 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 곡이 태진아와 인연이 닿으면서 가사 일부를 손질하고 제목을 ‘옥경이’로 바꿔 발표했는데, 태진아의 출세곡이자 1990년대 트로트 부활의 서곡이 된 것이다.
가수 박인희의 명곡으로도 거듭난 ‘세월이 가면’에서 박인환 시인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라고 했다. 역설적인 표현이다. 세월이 흘러간들 그 사람 이름을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 눈동자와 입술은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을 어찌하랴. 사랑은 가도 과거는 남는 것이다. 대중가요가 그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을 진솔하게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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