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르네상스] <50> 작곡가 박시춘과 손목인
2025-04-24
특히 일제강점기 망국의 슬픔을 대변하던 트로트는 분단으로 인한 실향과 이별의 정서를 담고 상처 난 겨레의 심중에 스며들었다. 그 대표적인 노래가 ‘비내리는 고모령’ ‘울고 넘는 박달재’ ‘고향초’ 등이었다. ‘고모령’과 ‘박달재’는 우리 민족이 고향을 떠나면서 속절없이 넘어야 했던,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의 아픔을 나누어야 했던 눈물 어린 인생고개의 상징이었다.
어머니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 부엉새가 울고 가랑잎이 휘날리던 산마루턱, 맨드라미는 피고 지는데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을 못 잊어 다시금 떠올리는 고모령(顧母嶺).
고모령은 대구에 실존하는 나지막한 고갯길이다. 하지만 대중가요 가사의 문학적 상상력 덕분에 전국적인 유명 고개가 되었다. 실제 영(嶺)의 공간을 넘어 현대사의 격류 속에 한국인이 넘어왔던 정신적인 고개의 상징이 된 것이다.
‘비내리는 고모령’은 격동의 세월 따라 곡절 많은 삶을 살아온 대중의 가슴 속에 깊이 각인된 애틋한 이별의 고개이다. ‘울고 넘는 박달재’와 함께 중장년층의 노래방 애창곡으로도 가장 많이 호출되는 사모(思母)와 망향(望鄕)의 노래이다. 가수 현인과 작사가 유호, 작곡가 박시춘 콤비의 명작 트로트곡이다. ‘울고 넘는 박달재’도 마찬가지이다. 대폿집 젓가락 장단에 구성지게 오르내리던 온 국민의 애창곡이었다.
‘박달재’도 비록 가본 사람은 드물지만 모르는 사람도 드물다. 대중가요의 위력이다. 노래는 박달재의 실제 이별 장면과 박달재에 얽힌 애달픈 전설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1947년 작사가 반야월이 악극단 순회공연을 따라 충주에서 제천으로 넘어갈 때였다. 박달재 주막에서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다가 산모퉁이를 적시는 남녀의 애틋한 이별의 눈물을 보고 노랫말을 지었다고 한다.
2절 가사는 박달재의 전설인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가슴 아픈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그렸다. ‘박달재’도 내우외환이 잦았던 한국인들이 울며 넘어야 했던 고개의 표상이다. ‘울고 넘는 박달재’는 분단과 실향, 이산(離散)에 따른 또 다른 이별의 은유이기도 하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넘어야 했던 눈물 맺힌 분수령이다. KBS 가요무대에서 최다 신청이 들어온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시름겹고 혼란한 시대의 고갯길이었던 ‘고모령’과 ‘박달재’를 소재로 한 이 트로트곡들은 고려가요 ‘가시리’의 현대적 변주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인의 깊은 이별의 서정에 부응하며 오랜 명곡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고향초’는 보내고 남은 사람의 슬픔과 공허에 좀 더 기울어 있다. 정든 사람이나 가슴에 담고 있던 님이 떠나고 없는 고향을 지켜보는 화자의 상실감과 서러움이 짙게 묻어있다.
1940~50년대 피폐한 농어촌의 풍경과 이농의 현상을 시린 감성으로 그렸다. 한국인에게 고향이란 이렇게 정감(情感)이기도 하고 통점(痛點)이기도 하다. 가사와 선율에 스민 정제된 비감(悲感)은 궁핍했던 시절의 고향과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린다.
녹록지 않은 세상, 세파에 지친 우리네 가슴은 또 어떤 ‘고모령’과 ‘박달재’를 넘어가고 있는가. 이젠 그나마 ‘고향초’라도 불러줄 사람이나 있는가.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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