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르네상스] <50> 작곡가 박시춘과 손목인
2025-04-24
‘유랑청춘’이라는 트로트 곡에는 분단 70년의 깊은 회한과 설움이 배어있다. 국민 MC였던 고(故) 송해가 부른 이 노래는 북한에서 내려온 월남인 망향가의 피날레에 해당한다. 이제는 더 이상 북녘을 향한 망향가를 부를 사람도 들을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국노래자랑 최장수 사회자였던 송해가 2015년 ‘유랑청춘’이란 망향가이자 사모곡을 내놓았을 때가 실향 70년이었다. 이제는 모습마저 가물가물한 어머니에게 이 노
래를 바친다고 했다. 노랫말 그대로 아득하고 아득한 세월, 툇마루에서 손 흔들던 어머니의 무덤마저 살펴보지 못한 채 송해는 2022년 눈을 감았다. 6·25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온 송해는 두 번 다시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분단과 전쟁의 와중에 북녘의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한 망향가의 서곡은 ‘꿈에 본 내고향’이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노래를 부른 가수 한정무도 1·4후퇴 때 월남한 실향민이었다. 그래서 타향살이의 애환과 가족상봉에 대한 애원이 흠뻑 배어있다. 전란의 아픔과 실향의 슬픔을 대변했던 한정무도 망향가를 부른 지 10년도 못 되어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대중가요는 시대의 풍정을 담고 있다. 한정무가 불러서 히트한 ‘꿈에 본 내고향’은 한국전쟁 중에 나온 명곡으로 실향(失鄕)과 이산(離散)의 고통을 망향(望鄕)이라는 보편적 정서로 승화한 노래이다.
1958년 발표한 ‘한많은 대동강’은 작곡가 한복남, 작사가 야인초, 가수 손인호 모두 북한에서 내려온 월남민이었다.
‘한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 있느냐, 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양이 그립구나…’
월남한 피란민들에게 대동강은 북녘에 있는 고향의 대명사이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마중물이었다. 한복남이 작곡을 해놓고 손인호의 이전 레코드사 전속이 끝나는 3년을 기다렸다가 기어이 취입을 한 노래였다는 일화도 전한다. ‘한많은 대동강’은 2018년 4월 남한예술단 평양공연에 참가한 송해가 꼭 부르고 싶어했지만, 북한 당국이 허락하지 않았던 망향가이기도 하다.
1972년 나훈아가 부른 ‘녹슬은 기찻길’은 남북간 전쟁과 대결 그리고 오랜 경색의 상처를 토로한 절창이다.
‘휴전선 달빛 아래 녹슬은 기찻길, 어이해서 핏빛인가 말 좀 하렴아, 전해다오 전해다오 고향 잃은 서러움을…’
휴전협정을 맺은 지 20년을 앞두고 나온 이 노래는 지속된 남북 분단 고착화의 상흔을 녹슨 기찻길에 비유한 통증의 되새김이었다. 다음역 이정표가 없는 철도 중단점의 탄식이었다.
‘녹슬은 기찻길’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의 데탕트 분위기에 부응한 노래이기도 했다. 하지만 끊어졌던 철길을 잇고 열차가 남북을 왕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겨레의 염원은 금세 무산되고 말았다. 그 이후의 일시적인 남북회담과 이산가족 상봉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의 한류가 지구촌에 넘실거려도, 눈앞의 북녘을 향한 철마는 오늘도 핏빛 기찻길 위를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월남 실향민이었던 송해는 KBS 가요무대에서 ‘꿈에 본 내 고향’을 자주 불렀다. 2003년 평양을 방문한 송해는 어둠살이 내리는 대동강을 바라보며 ‘한많은 대동강’을 홀로 불렀다.
노쇠한 월남인들의 실낱같은 귀향(歸鄕)의 꿈조차 이제는 스러져 버렸다. 여우의 수구초심과 연어의 회귀본능마저 짓밟는 폭정의 횡포 속에 이산의 쓰라림과 망향의 울먹임도 민족사의 한으로 침잠(沈潛)하고 있다.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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