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르네상스] <50> 작곡가 박시춘과 손목인
2025-04-24
‘어이 얼어자리 무슨일 얼어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잘까 하노라’(한우)
‘산촌에 밤이 드니 먼데 개 짖어온다, 시비를 열고보니 하늘이 차고 달이로다, 저 개야 공산 잠든 달을 짖어 무엇 하리요’(천금)
조선시대 명기(名妓)는 풍류가객(風流歌客)과 문인묵객(文人墨客)의 시대를 초월한 연인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녀들은 시인(詩人)이자 예인(藝人)이었으며 허투루 웃음을 팔지 않았던 꽃 중 꽃이었다. ‘청산(靑山)은 내 뜻이요, 녹수(綠水)는 임의 정(情)’임을 노래하며, 공산명월(空山明月)의 내면을 지녔던 해어화(解語花)였다. 그런데 일제의 침략으로 기생 사회도 굴욕을 겪었다.
일제강점기 기생들은 사라져가는 우리 민속음악을 보듬은 최후의 보루였다. 기생들은 신민요와 유행가를 부르며 가수로 활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화자, 왕수복, 선우일선, 이은파 등은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가수였다. 기생들은 자신들의 처량한 삶을 탄식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곡이 이화자의 ‘화류춘몽’이다. 그것은 부질없이 피었다 지는 무명화(無名花)의 눈물과 한숨이었다.
‘꽃다운 이팔 소년 울려도 보았으며, 철없는 첫사랑에 울기도 했더란다, 연지와 분을 발라 다듬는 얼굴 위에, 청춘이 바스라진 낙화 신세…’
기생의 서러운 삶과 기구한 운명을 이처럼 처연하게 드러낸 노래도 드물 것이다. 기생을 노류장화(路柳墻花)라 했던가. 길가에 버들이요 울타리의 꽃인 화류계(花柳界)의 박복한 여정이 오죽했을까. 노랫말 그대로 사랑에 속도 돈에 울기 일쑤였을 것이다.
‘화류춘몽’은 상처와 유린으로 얼룩진 기생들의 애환과 설움을 오롯이 대변한 통곡(痛哭)의 비가(悲歌)였다. 험난한 역사의 희생양이 되어 애달픈 삶을 살다가 물거품처럼 스러져 간 한 떨기 야생화. 외롭고 허망한 운명을 탄식하는 노랫말 ‘이름이 기생이면 마음도 그러냐’는 대목은 차라리 절규에 가까웠다. 그것은 기생들만의 눈물과 한탄이 아니었다. 암울한 시대를 대변한 가요이기도 했다.
특히 오랜 세월 인구에 회자한 노래 ‘홍도야 울지 마라’의 2절 가사가 그것을 웅변한다.
‘구름에 싸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을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여기서 ‘구름에 싸인 달’이 암울한 식민지 현실임을 쉽게 읽을 수 있다. 기생들의 삶을 변용한 망국의 애가(哀歌)이기도 했던 것이다. 일제 말기로 접어들수록 기생의 노래도 시름과 절망의 빛이 짙어갔다. 대중가요는 시대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식민지 시대 남매의 기구한 사연을 노래한 ‘홍도야 울지 마라’는 대폿집 젓가락 장단에 실린 국민가요였다. 1936년 김영춘이 부른 ‘홍도야 울지 마라’는 극단 청춘좌가 서울 동양극장에서 무대에 올린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신파극의 주제가였다. 그런데 노래의 히트가 연극의 흥행을 이끌며 막사발과 같은 불후의 유행가가 되었다.
홍도는 참담한 시절에도 정절을 지키려 했던 기생의 대명사이면서 민족적 자존을 버리지 않았던 식민지 지식인의 표상이기도 했다. 명예와 지조를 헌신짝 버리듯 하는 사람들이 어찌 홍도를 탓할 수 있을까.
알량한 권력과 천박한 자본에 취해 최소한의 인간적 가치마저 내팽개치고 갈지자 행보를 보이고 있는 오늘 우리 사회에는 ‘홍도야 울지마라’의 신파적 비극미마저 아쉽다.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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