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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 르네상스] <42>섬과 육지의 간격

한양경제 2025-02-27 11:10:14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비운의 명곡 ‘동백 아가씨’는 노랫말이 시사하듯, 가요 그 자체도 오랜 운명적 비애를 감내해야 했다. ‘동백 아가씨’는 사랑에 속고 기다림에 지친 여인의 한을 붉게 멍든 동백꽃과 연계한 작사가 한산도의 문학적 상상력의 귀결이었다. 

그것은 섬 처녀와 서울 총각의 이루어질 수 없는 신파조의 타령을 넘어, 도시와 농어촌 간의 격차와 격리로 상실감에 젖은 사람들의 서러움을 대변하는 노래로 승화되었다. 그래서 전쟁의 후유증과 가난의 서러움으로 한서린 당대 서민들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으며,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빈곤에 지친 대중의 가슴 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동백 아가씨’는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다. 

한일국교 정상화에 따른 비판적 여론을 회유하기 위한 방송금지와 판매중지의 사슬에 묶인 것이다. 이유는 왜색(倭色)과 비탄조였다. ‘동백 아가씨’ 한 곡으로 엘레지의 여왕으로 등극했던 이미자의 가슴도 빨갛게 멍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자의 노래는 신산한 삶을 감내하며 살아가던 대중의 아픔을 대변한 신음이었고, 서민의 슬픔을 대신한 곡성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열아홉살 섬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동백 아가씨’에 이어 섬처녀의 순정과 이별의 아픔을 소재로 한 소외된 사람들의 자기연민적 변주는 ‘섬마을 선생님’이라는 드라마와 영화의 주제곡으로 연결되었다. 그 슬픔의 색깔 역시 동백꽃에 이은 해당화의 붉은 색이었다. 

해당화는 한갓진 바닷가 모퉁이에서 늦은 봄에야 수줍은 듯 홍자색 꽃을 피운다. 거친 비바람이 불어오면 흰 모래밭에 후두둑 떨어진 붉은 꽃잎이 님 그려 울다 지친 여인의 각혈인양 처연하다. 순정을 바친 섬색시의 화신이다. 노래는 섬마을과 서울 사이의 공간적 거리를 섬색시와 선생님의 심리적 거리로 은유하며 비애감을 고조시킨다. 하지만 ‘섬마을 선생님’도 금지곡의 신세가 되었다.

두 곡 모두 일제강점기 트로트의 체념적 미학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었지만, 근대화에 낙후된 사람들의 비애와 절망을 대변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역시 이미자가 부른 ‘흑산도 아가씨’와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도 같은 정서의 노래였다. 산업화에 성공한 도시 사람들과 후미진 섬지역 사람들 간의 물리적 심리적 격차를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만번 밀려 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빨갛게 멍든 ‘동백 아가씨’에 비해 뭍을 그리던 ‘흑산도 아가씨’의 가슴은 검게 타버렸다. 아득한 외딴섬 아가씨의 숙명적인 슬픔은 이촌향도의 시대적 애환을 웅변하고 한국인의 고단한 일상을 위무하며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 아~ 바다가 육지라면 눈물은 없었을 것을’. 조미미의 대표곡 ‘바다가 육지라면’도 그렇다. 사랑하는 연인을 갈라놓는 것이 어찌 바다 뿐이겠는가. 정현종의 ‘섬’이라는 짧은 시가 토로하듯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고’ 그리워하면서도 가닿을 수 없는 그곳이 곧 우리 인간의 숙명적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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