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성의 자연에세이] <23> 늦겨울, 봄에로의 이행기
2025-02-03

자연의 지배자는 식물이라 할 수 있다.
식물은 평지는 말할 것도 없고 험준한 산이나 심지어 바다 속에도 많은 종들이 적응해 살고 있다. 동물은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자연의 일정한 공간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지만 그 범위는 매우 한정돼 있다.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동물인 인간과 개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동물은 그 삶을 기본적으로 식물에 의존한다. 육식동물이라 하더라도 초식동물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의 주인은 식물인 셈이다. 동물은 식물에 기생할 뿐이다. 식물이 번성해야 동물도 번성할 수 있다. 식물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열매를 맺고 씨앗을 퍼뜨려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먼저 꽃을 피워야 한다. 식물이 꽃을 피우는 일은 그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온대지방인 우리나라의 중부 지방에서 가장 많은 식물들이 꽃을 피워내는 때는 대체로 3월 하순에서 4월 중순까지의 어간이다. 특히 4월 초순에는 가장 화사한 꽃들이 만발하는 때다. 이 무렵에 많은 화사한 꽃들이 피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 무렵은 24절기의 ‘춘분(春分, 3월20~21-4월3~4일)’의 말후와 ‘청명(淸明: 4월5~6-4월19~20일)’의 전 기간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이때는 연중 기온 상승이 가장 급격히 이루어지는 춘분 절기의 마지막 5일과 날씨가 맑고 밝다는 청명 절기의 전 기간 약 15일의 시기여서 기온도 상당히 올라 있고 해의 고도도 꽤나 높아진 때로서 대기가 매우 맑고 밝은 때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너무 춥거나 덥거나 하지 않아 식물들이 생식(生殖)을 위해 꽃을 피우기에도 적당한 시기인 셈이다. 실제로 이 무렵에 연중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피어난다. 그리고 여러 빛깔들의 고운 꽃들이 잔뜩 피어나면 세상은 그로 인해 더욱 더 환해진다.
이 어간에 피어나는 풀꽃으로는 꽃다지, 광대나물, 괭이눈, 봄까치꽃, 봄맞이꽃, 앵초, 양지꽃, 민들레, 제비꽃, 수선화, 할미꽃, 자운영, 백리향, 얼레지, 현호색, 은방울꽃 등을 들 수 있다.
나무꽃으로는 매화, 산수유, 생강나무꽃, 진달래, 개나리, 목련, 벚꽃, 복사꽃, 살구꽃, 오얏꽃, 배꽃, 사과꽃, 앵두꽃, 명자꽃, 박태기, 황매화, 버들강아지, 조팝꽃 등이 있다. 이들 꽃들은 꽃가루받이를 위해 곤충을 유인해야 하기 때문에 흔히 화려하고 향기롭다.
이들 붉거나, 노랗거나, 하얀 꽃들이 어우러져 한꺼번에 피어나면 세상은 화사한 꽃들로 불을 켠 듯 환하다. 그야말로, ‘꽃 등불’을 켠 듯, 백화난만(百花爛漫: 온갖 꽃이 피어서 아름답게 흐드러짐)한 꽃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시절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 봄꽃들은, 특히 나무 꽃들은 잎도 나지 않은 나무 가지에 온통 꽃들만 가득 피어나서, 세상을 꽃으로 뒤덮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다. 이들 꽃들로 인해 세상은 여기저기 꽃 무더기가 널려 있는 꽃 천지가 된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세상은/오만가지 색색의 고운 꽃들이/자기가 제일인양 활짝들/피었답니다”[이해인, 〈사월의 시〉 중에서]. 이들 봄꽃들이 한 데 어울린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면 산야는 꽃으로 수놓은 듯 울긋불긋한 꽃 세상이 된다. 10월의 단풍철과 함께 4월의 꽃철은 우리의 자연이 천자만홍으로 가장 아름다운 때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따뜻하고 밝은 날씨에 잎도 없는 나무에 화사한 꽃들이 가득 피어나는 춘분 절기의 후반 무렵과 청명 절기의 전 시기의 세상은 꽃으로 더 밝고 맑아진다. 이때 꽃들로 인해 “봄이 오면 가지마다 꽃 잔치 흥겨우리”[김재호, 〈고향의 노래〉 중에서]라는 시구처럼 꽃 잔치가 벌어진다. 그런데 그 잔치로 진짜 흥겨운 건 우리 인간이다. 중국 시인 정호는 “지금은 바야흐로 청명 절기의 호시절이니/마음껏 놀다 돌아가는 것을 잊은들 어떠리”라고까지 노래했다.
영국 시인 하우스만은 “부활절을 맞아 소복을 입고 있는” 벚나무를 보는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숲으로 간다고 노래했다. 우리의 시인도 “가슴 터지도록/이 봄을 느끼며/두발 부르트도록/꽃길 걸어볼랍니다.”[이해인, 〈사월의 시〉 중에서]고 말한다.
우리 선조들은 이 무렵인 음력 3월 3일 즉 삼짇날에 ‘화류(花柳)놀이’ 또는 ‘화전(花煎: 꽃잎을 붙인 부꾸미)놀이’란 이름으로 가족이나 친지들과 함께 음식을 장만해 산으로 꽃놀이를 가서 하루를 즐겼다.
이러한 봄꽃놀이의 전통은 봄꽃 축제와 함께 오늘날에도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지역에 따라 약간의 시차가 있기는 하지만, 전국 각지의 봄꽃축제들이 대체로 청명 어간에 개최된다. 이 무렵은 꽃놀이나 꽃축제를 즐기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전국 어디서나 각종 봄꽃들이 만개하여 꽃의 낙원이 펼쳐지는 최고의 꽃철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 무렵에 연인이나 가족이나 친지와 함께 꽃놀이를 위한 나들이를 한다. 우리도 잠시나마 일상을 멈추고 커다란 꽃나무 아래서 미풍에 날리는 꽃잎들을 감상하며 술 한 잔 마시는 여유를 가져보자.
어쩌다 술잔에 꽃잎이 떨어지면 술과 함께 마시는 멋도 부려보자.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이때 하루쯤은 일상에서 벗어나 꽃과 어울리고 자연을 벗해 옹졸한 마음을 내던지고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에 환한 웃음으로 답하며 호연지기를 키워보자!

이효성 전 성균관대 언론학과 교수·전 방송통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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