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를 선도하는 '경제 나침반'

[머니 패러독스]<4> ‘가계부채 늪’으로 재연되는 ‘제로섬 게임’

기업부채가 촉발한 IMF 외환위기 후 성장한 시장
빚내길 두려워 않는 시대…‘고수익 좇기’ 경쟁으로
과거 흔적 여전히 남은 금융시스템…고금리의 끝단은
한양경제 2023-10-31 16:08:52
경제에 냉기가 돌고 성장과 금융 기능이 위협받을 때, 파생시장은 오히려 활기를 띤다. ‘위험 회피’(Hedging)를 위한 거래와 투기(Speculation) 거래 수요가 동시에 폭발한다. 시장이 좋을 땐 좋아서 나쁘면 나쁜 대로, 영원히 확장을 지속할 것 같은 파생시장은 철저하게 제로섬(Zero-Sum) 게임의 현장이다. 

내가 만일 백만 원을 벌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백만 원을 잃었다는 의미다. 예외라면 전혀 없다. 네가 불행해져야만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비정한 세계에 사람들이 몰린다. 총알이 잔뜩 채워진 총을 들고 전쟁터라도 가는 것처럼 돈을 싸 들고 비장하게 참전한다. 

성실하게 일하고 저축하며 누구나 미래를 꿈꾸던 시대가 끝나버린 건 아닐까. 우리 자본주의 경제 안에서는 주주도 노동자도 소비자도 투자자도 다 국민인데 과연 모두가 행복해지고 있을까. 수많은 주식 투자자들은 얼마나 벌고 또 잃고 있을까. 파생시장 참여자는 투자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도박을 하고 있을까. 도대체 이 변화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시계를 과거로 돌려 볼 참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한국 경제는 고도성장 정점에서 빛을 발했다. 성장률뿐 아니라 경제의 질과 규모가 일정 궤도에 오르자,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물결은 우리에게도 왔다. 개방 경제로의 본격 진입은 피할 수 없었고 피하려 하지도 않았다. 

금융시장을 개방하자 외국 자본이 한국 자본시장에 강력하게 진입했고 기업은 생산능력 확장 경쟁을 벌였다. 기업 부채 증가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양과 속도가 문제였다. 우리 경제의 내적 역량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부채 규모가 커졌을 때 문제가 터졌다. 

기업 도산은 셀 수도 없었고 국민 삶은 나락에 떨어졌다. 그 많던 은행조차 죄다 망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20세기 끝과 21세기 시작은 지독하게 암울했다. 지금까지도 IMF 사태로 기억하는 그 외환위기 얘기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는 기업 부채 위기였다. 국가는 국민의 금 모으기와 소비 확대로 ‘얼버무려’ 넘겼다. 역사적 참사를 겪으면서도 일부에선 고속 성장의 흔적, 지독한 성장통 아니면 극복 가능한 후유증 정도로 받아들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통스러운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세상도 사람들도 바뀌기 시작했다. 누구나 취직하면 적금 들고 결혼 준비하던 문화가 북극 빙하 녹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동네 강아지도 집 밖에 나갈 땐, 입에 물고 나간다’고 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신용카드가 흔해졌다. 저금리 시대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저축을 포기하기 시작했고 빚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금리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쥐꼬리만 한 이자마저도 더 줄어들 기미가 보이자 사람들은 당황했다. 초과수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자본시장에 뛰어들었다. 이름도 낮 선 각종 펀드와 금융 상품이 저축의 자리를 대신했다. 

사람들이 저축 대신 투자와 소비에 열 올리기 시작한 이유는 사실 정부 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식어버린 경기를 살려야 했고 이자 수익을 대체할 뭔가를 만들어줘야 했을 테니까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소비가 미덕이 되고 현명한 투자는 시대의 테마가 됐다.

시장에 참여자가 늘어나고 돈이 몰리면 가격이 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자산의 경우, 시장 가격이 오르면 참여자는 대부분 행복해졌다. 하지만 자산을 아직 가지지 못한 사람에겐 재앙이 되기도 했다. 가격이 오를수록 새로이 자산 시장에 진입하긴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왜 경제 정책은 한쪽을 행복하게 해주면서 다른 편은 불행하게 만들어 주는 걸까.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이룬 배경엔 국민의 저임금 노동력이 있었다. 수출하고 남은 상품도, 수출가격보다 비싼 상품도 국민은 불평 없이 받아내야만 했다. 수출 경쟁력이 뒤처지는 기업은 국민에게 고통을 전가하면서 버텼고 국가는 못 본 척했다. 성장의 과실이 나라 발전을 위해 희생을 감내한 국민에게 공평하게 나눠지지 않았다. 인색한 국가는 국민을 무한 경쟁으로 몰아넣을 궁리를 했다. 

대기업에 집중적으로 자원을 분배한 경제 정책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를 따지려고 시작한 얘기는 아니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의 삶과 경제에 대한 국가의 태도가 어땠는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아볼 필요는 분명히 있다. 지금 우리 금융시스템엔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에. 

돈, 그 숫자가 커지는 것과 실질 가치의 상승이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다. 주식이든 집이든 아무리 가격이 올라도 물가통계엔 반영되지 않는다. 인플레이션 걱정일랑 뒤에 숨겨 놓고 자산 가격 상승에 환호했다. 

내 돈으로 산 주식이든 대출 얻어 산 집이든 오르기만 하면 마냥 좋아할 일인지 잘 모르겠다. 27년 전 기업 부채 위기는 지금에 와서 가계 부채 위기로 탈바꿈했다. 

극단의 고금리 시대가 다시 온다면, 만일 위기가 다시 닥친다면 그땐 과연 국가와 기업이 나서서 국민을 도와줄까. 그걸 궁금해야 할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그게 더 궁금하다.

조용래 객원칼럼니스트/前 홍콩 CFSG증권 파생상품 운용역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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