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성의 자연에세이] <31> 번식과 성장의 시절
2025-06-02

9월은 초가을이다. 가끔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기는 하나 9월은 대기에서 습도가 가시고 산들바람이 불기에 연중 가장 기분이 좋은 시기다. 9월 들어 20여일이 지나면 밤낮의 길이가 같은 ‘추분(秋分)’이 오므로 9월은 밤낮의 길이에 큰 차이가 없는 달이다. 그래서 9월 동안에는 햇볕은 아직 따갑고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기도 하지만 복사열이 쌓이거나 하지는 않고 달구어졌던 땅과 대기는 많이 식어버린다. 그래서 한낮에도 선선하고 바슬바슬한 바람이 불고 조석으로는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게다가 일교차가 커져서 밤에 기온이 많이 떨어지므로 대기 중의 수증기가 엉겨 풀잎에 맑은 이슬이 맺힌다. 그러기에 24절기에는 9월 초순 어간에 맑은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白露)’ 절기가 있다.
9월은 감각의 계절이다. 9월 동안 대기는 맑아지고 하늘은 높푸르지는 가운데 햇살은 따가우나 선선한 바람이 부는 초가을의 전형적인 풍광이 펼쳐진다. 그 풍광 속에는 우리의 여러 감각에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많은 것들이 있다. 우선, 대기에서 습기가 가시면서 건조하고 선선해진 바람은 우리의 피부를 어루만지며 상쾌함을 안겨준다. 무르익은 포도의 단내, 청초한 들국화의 은은한 향기, 건초나 거름을 만들기 위해 베어둔 풀들에서 풍기는 짙은 향기는 우리의 후각을 즐겁게 한다. 바다같이 푸르러지는 높은 하늘, 벼가 노랗게 익어가는 가을 들녘, 바람에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마당에 널린 빨간 고추, 뾰족한 것 위에 앉은 빨간 고추잠자리를 보면 반갑고 친근하다. 섬돌 밑 귀뚜라미의 처량한 울음소리, 풀벌레들의 청아한 사랑의 세레나데, 건조한 대기에 마른 콩깍지가 툭툭 터지는 소리는 우리의 영혼을 울린다.
9월은 성숙의 계절이기도 하다. 초가을의 따가운 햇볕과 선선한 바람 속에서 들판의 오곡백과를 비롯하여 모든 것이 익어간다. 9월의 햇살과 바람에 의해 곡식들은 영글고 과일들은 단맛을 더한다. 특히, 포도는 이 무렵에 완전히 익는다. 이 무렵에 익는 것이 어찌 곡식과 과일 뿐이겠는가. 사실 그런 환경 속에서 모든 것이 성숙하기 마련이다. 이 시기에는 노랗게 익는 벼를 따라 메뚜기조차도 누렇게 익는다. 또한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말처럼, 하늘이 높푸르러지는 이때 말도 먹이가 풍부하여 살이 잔뜩 오른다. 말은 육체의 살이 오르지만, 인간은 영혼의 성숙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초가을 오곡백과가 익어가는 들판에서 감사와 풍요의 마음을 갖게 되고, 청명한 날씨 속에서 영혼의 울림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가을에는 인간도 성숙해지는 것이다.
날씨가 더 차지기 전에 후손을 퍼뜨려야만 하는 존재들은 9월이 되면 다급해진다. 그런 존재들 가운데 하나가 풀벌레들이다. 9월 초입의 어느 순간부터 요란하던 매미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 반면에 풀벌레들의 불협화음은 더욱 높아진다. 매미 소리에 가려졌던 풀벌레 소리가 청명한 대기에 공명하여 더 커지는지도 모른다. 여름에도 풀벌레들은 울지만 그때는 그보다 더 크게 우는 매미 소리에 치여 잘 들리지 않는다. 자기들의 소리를 압도하던 경쟁자가 사라진 후에야말로 짝을 유인하기에도 더 없이 유리한 때다. 더구나 날씨가 너무 차가워지기 전에 짝을 구해야 한다. 9월의 풀벌레들은 다급해져서 더욱 애잔하게 울어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매미가 없어져 버렸으니 풀벌레들의 사랑의 세레나데는 더욱더 크게 울려 퍼지는 것이다.
가을이 되면서 다급해지는 것은 풀벌레들만은 아니다. 풀벌레들이 그러하듯이, 식물들도 후손을 퍼뜨리기 위해 다급해지는 것이다. 꽃을 피워 꽃가루받이를 하고 씨앗을 성숙시키려면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기에 9월은 꽃을 피울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날씨가 차가워지면 벌들이 자취를 감추어 꽃가루받이를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아직 대기가 따뜻하고 햇살이 따가워서 벌들이 부지런히 활동할 때 꽃을 피워야 한다. 이것이 9월에 많은꽃들이 피는 이유일 것이다. 잎보다 먼저 피는 4월의 꽃들과는 달리 9월의 꽃들은 잎들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그처럼 잘 보이지는 않지만 관심을 갖고 잘 보면 들국화를 비롯하여 의외로 많은 꽃들이 피는 것을 볼 수 있다. 식물들이 후손을 퍼뜨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리다.
9월에는 조석으로 쌀쌀한 날씨로 인하여 풀잎과 활엽수의 나뭇잎들의 변색이 시작된다. 여름 동안 들녘을 푸른 대초원으로 만들었던 벼들은 9월에 들어서면 하루가 다르게 점점 더 노래지면서 추분 어간이 되면 들녘을 황금물결로 출렁이게 한다. 느티나무, 담쟁이덩굴, 칠엽수, 벚나무, 화살나무, 철쭉, 회양목, 수수꽃다리 등과 같이 단풍이 일찍 드는 나뭇잎들의 일부는 백로 어간부터 변색하기 시작하여 추분 어간에는 상당한 변색을 하는 것들이 나타난다. 잎파랑이의 천하에 서서히 조종이 울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효성 전 성균관대 언론학과 교수·전 방송통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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