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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 르네상스]<27> ‘고향설’과 ‘고향초’

백년설의 ‘고향설’, 타향 떠도는 식민지 백성의 애환
김광균의 ‘설야’, 떠나온 고향의 여인을 노래
장세정의 ‘고향초’, 쉬운 노랫말로 대중의 심금 울려
한양경제 2024-09-30 14:45:16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이오, 두 송이 눈을 봐도 고향눈일세, 끝없이 쏟아지는 모란 눈 속에, 고향을 불러보는 고향을 불러보는 가슴 아프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에 나온 백년설의 ‘고향설’(故鄕雪)은 국내외의 한국인들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크게 유행했다. 공교롭게도 가수의 이름과 노래의 제목 끝에 눈 ‘설’(雪)자가 들어가면서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정서에 더 호소했는지도 모른다.

‘고향설’은 나라를 잃고 고향을 떠나 타관 객지를 떠도는 우리 민족의 아픔이 하얀 눈처럼 지향 없이 내려서 쌓이는 듯 묘사했다. 교통수단이 전근대적인 시절의 농어촌 고향이란 한번 떠나면 돌아오기 어려웠다. 조상대대 살아온 산천과 부모형제의 인정을 머금은 고향집에 대한 그리움은 그만큼 더 간절했을 것이다. ‘고향설’은 그렇게 부평초처럼 떠도는 식민지 백성들의 애환을 대변한 노래였다.

망국과 실향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던 당시에는 특히 민족의식이 강한 지식인과 학생들이 부른 신세대의 애창곡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제의 요주의 가요가 되어 작사(김다인)·작곡(김해송)가와 가수(백년설)가 일경(日警)에 불려 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매운 겨울날을 하얗게 채색하는 ‘고향설’은 그렇게 겨레의 가슴에 새겨진 불멸의 망향가로 아직도 인구에 회자한다. 

‘고향설’을 흥얼거리다가 동시대에 발표한 그림 같은 시를 떠올려본다.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설야’(雪夜)이다.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도 소개되었던 김광균의 ‘설야’(雪夜)는 눈 내리는 광경을 ‘여인의 옷 벗는 소리’에 비유한 절창이다. 하지만 시각과 청각을 넘나드는 그 공감각적인 표현은 잃어버린 조국이고 떠나온 고향이며 두고 온 연인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속절없는 그리움은 슬픔이 되어 내리고 내려서 쌓이고 또 쌓인다. 절제된 감성의 토로와 고적한 풍경의 연출이 노랫말과 시구절에 공존한다. 

‘남쪽 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는데, 뽕을 따던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 

장세정의 히트곡 ‘고향초’(故鄕草)는 ‘고향설’의 역설이다. 해방이 되고 그리던 고향에 돌아왔건만 상실감은 여전하다. 정지용 시인이 설파했듯이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닌’ 것이다. 머나먼 타향에서 그토록 오매불망 그리워했던 고향이 아니던가. 

계절도 북풍한설의 겨울이 아닌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우는 무르익은 봄이다. 그런 고향에서도 공허감과 비애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정든 사람들이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의 수탈로 농촌경제가 해체되면서 광복 후에도 농민들은 생업을 찾아 대도시로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분단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 과정에서의 실향과 이촌향도의 물결은 ‘고향초’의 정한을 증폭시켰다. 

‘고향설’과 ‘고향초’가 계절과 공간의 극적인 대비 속에서도 동일한 사향(思鄕)과 망향(望鄕)의 정서를 길어 올린 비결은 작사가가 같은 김다인(조명암)이기 때문이었을까. 쉬운 노랫말에 담긴 정제된 비감(悲感)은 대중의 가슴 속에 오래 머물 수밖에 없었다. 우리 민족에게 고향이란 정감의 산실이면서 통점의 발원지였다. 그것은 오랜 유랑의 여정을 거쳐온 우리네 삶이 배태한 숙명적 정서인지도 모른다.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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