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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성의 자연에세이]<17> 11월, 숙살지기의 시절

십일월 늦가을은 찬바람 불어오고
추위가 시작되어 숙살지기 엄습하니
더 이상 월동 대책을 미룰 수가 없구나
한양경제 2024-11-07 11:38:30
이효성

11월은 늦가을로 기온이 크게 떨어지면서 추워지기 시작하는 달이다. 11월 초는 이미 추분을 40여일 넘긴 시점이므로 밤이 낮보다 상당히 더 길고 대지와 대기가 꽤 차가워져 있다. 게다가 시베리아로부터 삭풍이라고도 불리는 차가운 북서계절풍이 불어오고 기온도 많이 떨어지면서 추워진다. 이 찬바람과 추위는 겨울을 예고한다. 이 시점이 추분과 동지의 중간지점으로 11월 초순 어간에 온다.

그래서 24절기는 이때에 겨울에 들어선다는 ‘입동(立冬)’ 절기를 두고 있다. 흔히 이 무렵 산 정상에서는, 특히 밤에는, 처음으로 기온이 0도 이하로 떨어지게 되어 된서리가 내리고, 첫얼음이 얼고, 첫눈이 오기도 한다. 하순에 이르면 평지에서도 이런 일기 변화들이 나타난다. 그래서 24절기에는 11월 하순 어간부터 눈이 조금 온다는 ‘소설(小雪)’ 절기가 있다.

11월은 계절이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어 가는 시기다. 가을에서 겨울로의 이행은 온도만 좀 더 내려가는 것이므로 이행 그 자체는 비교적 순조롭게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행의 결과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 이행의 결과로 조금씩 차가워지는 날씨는 숙살지기(肅殺之氣)라는 가혹한 죽임의 기운을 낳기 때문이다.

이 엄습해오는 죽임의 기운은 생명체에게는 사실 ‘죽음에의 경고(memento mori)’라고 할 수 있다. 생명체들이 이 죽음에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숙살지기를 극복하려면 미리미리 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얼마 못 가서 죽임을 면치 못하게 된다. 따라서 11월은 생명체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추위를 극복하기 위한 방책을 마련하고 실행해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대부분의 생명체는 추위에 매우 약하다. 많은 생명체는 추위에 노출되면 생명을 잃는다. 그래서 온대지역의 생명체들에게는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나느냐가 생존과 번성을 좌우하는 일이 된다. 온대지역에서는 겨울을 날 수 있는 방법을 발전시킨 생명체들만 살아남아 생명을 이어오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온대지역의 생명체들은 겨울의 추위를 견디거나 극복할 수 있게 진화해왔다.

예컨대, 곤충들은 알이나 애벌레나 번데기의 형태로, 변온동물들은 땅속에서 겨울잠으로, 털이 있는 짐승들은 조밀하고 따뜻한 털로, 겨울을 나는 방식을 발전시켰다. 곤충의 변태나 은신, 변온동물의 겨울잠, 짐승의 털갈이 등 동물들의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는 11월 중에 마쳐야 한다. 인간도 11월까지는 몸을 보호할 따뜻한 옷과 거처를 데울 난방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겨울의 추위에 대한 대비는 식물의 생존에도 필수적이다. 추위에 대한 대비의 일환으로 식물들은 대체로 겨울 동안에는 생장을 멈춘 채 풀은 풀잎을 말려 없앤 후 뿌리로 연명하거나 씨앗으로 다음 세대를 이어가고, 낙엽수는 잎사귀들을 떨구고 뿌리와 줄기와 가지만으로 연명하며 겨울을 난다. 

나무가 잎을 떨구고 수액의 이동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은 겨울의 추위에 수액과 잎의 수분이 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나뭇잎이 살아 있으면 나무는 나뭇잎에 많은 수액을 보내야 하고 그러면 나뭇잎과 함께 나뭇가지마저 얼게 되므로 아예 나뭇잎을 말려 떨구어버리고 나목(裸木)이 되는 것이다. 낙엽수는 수액의 이동을 최저로 줄이고 최소한의 필수불가결한 생명활동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나무도 이렇게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를 11월까지는 마쳐야 한다.

이렇게 낙엽수의 생존전략으로 잎을 조락시키는 일이 대체로 11월에 완료된다. 그래서 11월에는 여기저기 낙엽들이 수북이 쌓이게 된다. 그랬다가 찬바람이 불면 그 잎들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다가 밟히어 바스러지거나 소리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청소부에 의해 치워진다. 이렇게 나뭇잎들이 낙엽으로 지고 찬바람에 흩어지거나 사라졌다가 종당에는 썩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 

봄에는 연초록으로 싱그럽고, 여름에는 진초록으로 다부지고, 가을에는 단풍으로 화려했던 나뭇잎들이 조락하여 초라한 채 사라지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이별, 소멸, 죽음 등을 상기시키고 우수와 비애의 정조를 자아낸다.

이것이 가장 전형적인 11월의 풍광이고 정서일 것이다. 그리고 잎들이 지면 나무는 헐벗은 채로 추운 날씨를 맞게 된다. 이른바 낙목한천(落木寒天)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동안 잎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잘 보이거나 두드러지게 된다. 예컨대, 잎 진 나무에 달린 붉은 감들이다. 

그 중에서도 더 두드러진 것은 새들의 먹이로 일부러 따지 않고 남겨둔 우듬지의 붉은 감들이다. 몇몇 감들이 감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차갑고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기라도 하듯 붉게 빛난다. 한국적인 늦가을 풍경이다. 그 모습은 김남주 시인이 “조선의 마음”이라고 말한 생명을 존중하고 자연과 공존하려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사상의 발현이기도 하다.


이효성 전 성균관대 언론학과 교수·전 방송통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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