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르네상스] <73> 월야유정(月夜有情) ④
2025-10-15
하춘화는 16세 때인 1971년 발표한 ‘물새 한 마리’를 부르면 지금도 가슴이 짠하다고 했다. 잇단 가수상을 안겨주며 정상급 국민 가수로 우뚝 서게 한 첫 히트곡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래는 급속한 산업화 시대를 배경으로 탄생했다. ‘물새 한 마리’는 농어촌을 떠나 도회지로 나온 숱한 청춘의 자화상이었다. 이촌향도의 물결에 휩쓸려 떠나간 사람들의 빈자리에 남은 사람들의 쓸쓸한 정서까지 대변한 노래였다. 시대의 감성을 담은 가요는 히트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흐느끼는 듯 간드러지는 하춘화의 목소리가 가요의 풍미를 더했다. 이 곡은 원래 이미자가 취입한 ‘바닷가 처녀’였다.
히트곡이 많았던 이미자의 노래로는 주목을 받지 못하자 5년 후 가사를 바꿔 리메이크한 것이다. 고봉산과 듀엣으로 부른 신민요 ‘잘했군 잘했어’로 하춘화는 존재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영암 아리랑’은 전통 아리랑의 대중가요적 변주이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영암 고을에 둥근 달이 뜬다’며 긴 호흡으로 부르는 도입부와 후렴구 ‘에헤야 데헤야 어사와 데야’가 기존 가요들과 차별성을 지닌다.
후렴 가사는 조선시대 문인 윤선도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중 ‘지국총(至菊悤) 어사와(於思臥)’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월출산 천왕봉에, 보름달이 뜬다.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달 보는 아리랑 임 보는 아리랑’. 향토적 정서를 보듬은 흥겨운 노랫말을 지은 사람은 당시 MBC 사장이던 이환의였다. 그러나 작사자 이름을 자신의 아호(雅號)인 백암(白岩)으로 했다.
방송사 사장이 자신의 고향을 노골적으로 홍보한다는 구설수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노래를 부를 가수도 영암 출신인 하춘화를 지명했다고 한다. 작곡도 하춘화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고봉산이 맡았다. 하춘화의 아버지도 이 노래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음은 물론이다. ‘영암 아리랑’의 탄생 비화이다. 1972년 열일곱 하춘화의 목청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그렇게 불후의 명곡으로 남았다.
하춘화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국내 최연소 가요계 데뷔’ ‘개인 최다 콘서트 기록 보유’ ‘리사이틀의 여왕’ ‘최초의 박사 학위 가수’ 등등. 하지만 그 무엇보다 빛나는 형용사는 ‘기부 천사’다. 가수 활동 중 200억 원에 달하는 기부금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내놓았다. 그래서 하춘화의 노래는 노래 그 이상이다. 하춘화의 가수 인생은 아버지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어린 딸의 음악성을 일찍이 간파한 아버지의 정성어린 후원이 없었다면 국민 가수 하춘화의 존재도 없었을 것이다. 가요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면서도 변함없는 나눔과 사랑의 무대를 이끌며 기부와 섬김의 삶을 살아온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다. 뒤늦게 예술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도 아버지의 덕분이라고 했다. 가수 인생 50주년을 즈음해 에세이집 '아버지의 선물'을 출간한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
코미디언 이주일과도 운명적인 상부상조의 인연을 지닌 하춘화는 고향 영암에 ‘한국 트로트가요센터’를 열었다. 마지막 꿈은 ‘대중예술전문학교’를 설립하는 것이라고 한다. 탁월한 노래 실력에 따뜻한 마음까지 갖춘, 가수 인생 60년간 작은 스캔들 하나 없었던 명불허전의 연예인. ‘알고 계세요. 당신만 사랑한다고….’ 트로트곡 ‘알고 계세요’의 노랫말 그대로 대중은 하춘화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댓글
(0) 로그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