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르네상스] <50> 작곡가 박시춘과 손목인
2025-04-24
‘대동아공영권’ 기치를 내걸고 중국 대륙과 동남아까지 침탈하면서 연전연승을 떠벌리던 일제의 갑작스러운 항복 소식에 식민지 조선인들은 한동안 멍해졌다.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민족지도자들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의 패망과 광복 소식에 백범 김구 선생은 “올 것이 너무 빨리 왔다”고 통탄을 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하지 못한 해방의 한계와 암울한 내일을 간파한 것이다.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는 함석헌 선생의 당혹감도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임시정부는 일제의 망조를 읽고 있었다. 따라서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광복군 낙하산 부대를 편성해 한반도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국내에 상륙한 광복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 일제의 항복 선언이 나왔다면 한반도의 운명은 또 달라지지 않았을까.
광복을 맞이한 김구 선생이 땅을 치고 통곡을 한 이유였을 것이다. 결국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명분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군과 소련의 군정이 해방공간의 극렬한 좌우 대립을 부추기며 기어이 동족상잔의 도화선이 되고 만 것이었다.
아무튼 일제의 패망과 민족의 해방이라는 그 엄청난 소식 하나만으로 삼천리 방방곡곡은 감격과 환희의 만세 소리로 뒤덮였다. 시대의 거울인 대중가요가 이 같은 광복의 기쁨을 놓칠 리가 없었다.
‘4대문을 열어라’, ‘해방된 역마차’, ‘럭키 서울’에 이어 등장한 노래가 ‘귀국선’이었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가수 이인권이 부른 ‘귀국선’은 나라를 빼앗기고 해외로 떠돌던 독립지사들의 망국한을 고스란히 담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애국열사들의 새 나라 건설에 대한 희망도 그렸다. 이보다 더한 해방의 기쁨과 이보다 더한 귀국의 감회를 역동적으로 표현한 노래는 없을 것이다. ‘귀국선’은 대중의 호응도나 가사의 상징성에서도 광복 직후의 시대 정서를 대변하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기대와 열망을 안고 돌아온 조국의 현실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현인이 부른 ‘신라의 달밤’은 해방공간의 극심한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피어난 낭만가요였다.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단한 대중의 일상을 위로해 준 노래는 정치적 담론에 치우친 투쟁가나 혁명가가 아니라 대중가요 트로트였다.
압제에서 벗어난 해방의 기쁨에 충만한 대중의 감수성에 부응한 첫 히트곡 ‘귀국선’에 이어 ‘신라의 달밤’이라는 명곡을 등장시키며 트로트는 남한 사회에 연착륙했다.
일본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징병을 피해 중국 상하이에서 극단 활동을 하다 귀국한 현인은 독특한 발성에다 세련된 풍모를 지닌 가수였다. 해방된 조국과 독립국가 건설에 필요한 근대적 낭만성과도 부합하는 이미지였다.
노래도 그랬다. 전주곡이 아라비아의 이국적인 선율을 떠올리다가 ‘아~아~’하는 영탄조의 첫 가사와 함께 본류인 트로트 가락이 전개된다.
‘신라의 달밤’은 그렇게 광복 후 분열과 대립, 혼란과 결핍 속에서 새나라 건설의 희망을 담은 낭만가요로 부상했다. 그러나 해방정국은 결국 이념 갈등과 남북분단, 그리고 동족상잔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되고 말았다.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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