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르네상스] <61>전쟁 가요(6)-전란의 상처
2025-07-17
주현미를 신데렐라로 등장시킨 1985년 데뷔곡 ‘비 내리는 영동교’는 우리 대중가요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우선 한동안 침체의 늪에 빠진 트로트 부활의 신호탄이었다.
정은이 남국인 부부의 작품이었던 ‘비 내리는 영동교’는 서울 강남 유흥가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전래의 비극성을 청산한 새로운 경향의 트로트를 창출했다. 그리고 간드러진 목청에 고상한 매력을 지닌 여가수 하나를 대중에게 선사했다. 그 배경에는 경제 호황으로 흥청거리던 강남의 유흥문화가 자리했다. 룸살롱 등에서 무르익은 환락의 밤 풍속과 화류계 여인의 심사를 대변한 것이다.
‘비 내리는 영동교’의 노랫말은 떠나간 남자를 잊지 못해 비 내리는 밤 흐느끼며 걷는 여성의 미련을 담았다. 강남 개발이 부른 유흥문화가 때마침 야간 통행금지 해제로 후끈하게 달아올랐던 시절의 반영이다. 뒤이어 강남의 특정 지명까지 등장했다. 그 욕망의 공간에서 손님과 질펀하게 마시고 놀며 정이 든 남자를 새벽까지 기다리는 화류계 여인의 일회적인 사랑과 이별의 감성을 그린 노래가 나온 것이다.
‘희미한 불빛 사이로 마주치는 그 눈길 피할 수 없어, 나도 몰래 사랑을 느끼며 만났던 그 사람, 행여 오늘도 다시 만날까 그날 밤 그 자리에 기다리는데, 그 사람 오지 않고 나를 울리네 시간은 자정 넘어 새벽으로 가는데, 아~ 그날 밤 만났던 사람 나를 잊으셨나 봐’.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은 1980년대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화려하게 꽃피었던 한국의 유흥문화를 토로한 대표적인 노래다. KBS·MBC 연말 가요대상에서 여자 신인 가수상을 받은 주현미는 ‘신사동 그 사람’에 이어 ‘비에 젖은 터미널’ 등을 발표하며 1980년대 후반 인기 가수의 정상에 우뚝 섰다.
유흥가에서 이루어진 중년 남녀의 짧은 만남과 야릇한 감정을 사실적으로 그린 노래의 분위기가 건전하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트로트가 기존의 슬프고 어두운 탄식조의 이미지를 벗어던지는데 일조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여기는 남서울 영동 사랑의 거리, 사계절 모두 봄봄봄 웃음꽃이 피니까, 외롭거나 쓸쓸할 때는 누구라도 한번쯤은 찾아오세요, 아아 여기는 사랑을 꽃피우는 남서울 영동, 사랑의 거리’.
문희옥이 서울예술전문대학 2학년이었던 1989년 발표한 경쾌한 리듬의 폭스 트로트곡 ‘사랑의 거리’는 대중가요 노랫말의 주무대가 남서울 영동으로 바뀌었음을 선포한 강남 찬가였다.
‘네온이 꽃피는 강남의 밤거리, 장미 한 송이 손에 들고서, 노래하는 강남 멋쟁이, 제 아무리 잘난 사람도, 어쩌다 두 눈길이 마주칠 때면, 느끼는 감정 참을 수 없어, 여보세요 한번만 만나주세요, 하면서 미소를 받는, 강남 멋쟁이’.
1990년 나온 ‘강남 멋쟁이’도 마찬가지다. 강남의 애정 풍속도를 담은 트로트곡이다. 환락가로 바뀐 강남에서 노골적인 향락을 추구하는 남녀의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저 먹고 마시는 유흥의 동선에 누구라도 한번쯤 찾아오라는 적나라한 호객의 선언이다. 영혼 없는 하룻밤 풋사랑도 쉽게 이루어지는 환락가 여인들의 노골적인 구애와 연민의 정을 그린 것이다. 이와같은 주현미와 문희옥의 강남 풍속가(風俗歌)는 강남에서 성장해 강남의 남녀를 주제로 ‘강남 스타일’을 만들어 세계적인 스타가 된 가수 싸이의 음악적 모태(母胎)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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