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를 선도하는 '경제 나침반'

[이효성의 자연에세이]<6> 가는 봄날

도도한 시간 흐름 아무도 막지 못 해
모든 것 예외 없이 덧없이 사라지고
호시절 봄날조차도 허망하게 간다네
한양경제 2024-05-16 13:16:26
16일 서울 개포동에서 5월에 피는 꽃, 불두화 꽃잎들이 우수수 져 있다. /이효성

어느 계절이건 왔다가 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로 계절이 왔다 가는 것에는 별 감흥이 없다. 사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잘 인지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유독 봄이 왔다 가는 것은 잘 느끼고 많은 감흥을 보인다. 봄에는 화사하고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피지만 이내 져버리면서 봄날이 끝나가는 것이 시각적으로 뚜렷이 감지되는 탓도 작용할 것이다. 

그래서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라는 노랫말을 지닌 가요 ‘봄날은 간다’(손노원 시, 박시춘 곡)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많은 가수들에 의해 불린 이유일 것이다. 같은 제목의 다른 시인들의 시도 적지 않다. 봄이 가는 것은 그만큼 특수한 감흥을 일으키는 일이다.

인간을 포함하여 생명체는 대체로 추위에 약하고 생명을 잃기도 한다. 과거 의식주가 발달하지 못했던 때의 겨울은 그 추위 때문에 견디기도 어렵고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었다. 의식주가 발달한 오늘날에도 겨울은 여전히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계절이다. 그래서 겨울에는 그런 염려가 없는 따뜻한 봄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우리는 대체로 봄 이외의 다른 계절은 기다리지 않는다. 겨울은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춥기에, 여름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무덥기에 기다리지 않는다. 또 가을은 선선하고 좋은 계절이지만 여름이 위험한 계절은 아니기에, 굳이 가을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겨울의 추위 속에서는 목숨이 안전한 따뜻한 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봄은 언제나 기다려 맞는 계절이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리던 봄이 온다면 그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반가움은 잠시뿐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봄도 금세 가버리기 때문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기에 그에 따라 어떤 계절이든 일단 오고나면 어느덧 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추위의 위험과 속박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그래서 기다려왔던 봄이기에 그것이 가버리는 일은 그만큼 빠르게 느껴지고 더 아쉽고 안타가운 일로 인식되는 것이다. 우리의 한 시인은 “날은 빠르다/봄은 간다”(김억, ‘봄은 간다’ 중에서)고 탄식했다.

봄은 꽃으로 시작되고 꽃은 봄의 상징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꽃이 피면 봄이고 꽃이 지면 봄도 끝난다고 생각하게 된다. 화사한 꽃들이 피고 지는 사이에 봄날도 가버리는 것도 사실이다. 아름다운 꽃이 지면서 기다려 맞았던 봄도 가버린다는 것은 그만큼 더 아쉬운 일이다. 

시인 김영랑이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모란이 피기까지’는 중에서)라고 안타까워한 것처럼. 그래서 그에게 봄은 “찬란한 슬픔”이었다. 이러한 슬픔을 연인과 함께 하지 못하는 심정을 당나라 여류 시인 설도(薛濤)는 ‘춘망사(春望詞)’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風花日將老 佳期猶渺渺(꽃은 바람에 나날이 시드는데, 만날 날은 오히려 아득해지네).” 

우리의 시인 김억은 이 구절을 ‘동심초(同心草)’란 이름으로 이렇게 번안했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동심초’는 작곡가 김성태가 곡을 붙여 유명한 가곡이 되었다.

시간의 속도는 누구에게나 동일하지만 나이가 어릴수록 시간이 느리게 느껴지고, 반대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느껴진다고 한다. 이는 동일한 길이의 시간 동안의 활동량이 나이가 들수록 대체로 적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애일수록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어른일수록 가만히 있는 현상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나이가 적을수록 활동량이 많고, 나이가 많을수록 활동량이 적다. 따라서 나이가 많을수록 봄날이 더 짧고 더 빨리 지나가 버리는 것으로 인식되기에 아쉬운 마음도 더 클 것이다.

더구나 봄날은 청춘의 은유이기에 봄날이 간다는 것은 청춘이라는 화려한 시절이 지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봄날, 즉 인생 최고의 시절인 청춘이 가버리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영국 시인 셸리도 “네 청춘의 영광 언제 다시 오려나?/다시는—오,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고 비탄했다. 화려한 봄날 속에 이런 슬픔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사철에 비유한 ‘사철가’라는 판소리 단가는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라며 이어진 여름, 가을, 겨울도, 즉 나이가 들어가도, 나름대로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있으니 그것을 받아들이고 언제든 기꺼워하라고 권한다.

그렇다. 봄날이 가는 것은 아쉽지만 그리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여름, 가을, 겨울도 다 나름대로 멋과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피할 수 없듯, 청춘도 가고 나이가 들어 늙고 끝내는 죽음에 이르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과정이다. 

피할 수 없는 것을 슬퍼한다고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지나가 버린 것이나 지나가는 것을 인정하고 담담히 받아들이되 아직 지나지 않은 남은 인생의 한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사는 일일 것이다. 지나간 또는 지나가는 날을 애상하지 말고, 지금 우리 앞에 와 있는 날을 최대로 향유하자.

 

이효성 전 성균관대 언론학과 교수·전 방송통신위원장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깨끗한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 0 / 300
3년 뒤 주택 공급난 닥치나

3년 뒤 주택 공급난 닥치나

향후 2~3년내부터 수도권을 중심으로 주택 공급난 영향으로 집값 상승 우려가 있다고 한다. 특히 차기 정부가 현 정부의 주택공급 정책을 이어서 시행

DATA STORY

더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