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석유화학산업은 지난 40여 년간 국가 경제 성장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한 이 산업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며 한국의 GDP를 크게 끌어올렸다. 1980년대 초반 약 650억 달러 수준이던 한국의 GDP는 2023년 약 1조 7천억 달러로 성장했으며, 이 과정에서 석유화학산업은 수출과 고용 창출을 통해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최근 글로벌 경쟁 심화, 중국과 중동의 대규모 공장 설립, 탄소중립 요구에 따른 규제 강화, 그리고 석유산업의 구조적 변화로 인해 산업 전환이 시급한 상황이다. 과거 석유산업이 호황과 침체를 주기적으로 반복했지만, 전기차와 대체 에너지로 전환되는 새로운 시대에서는 이러한 경기사이클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의 기술적 우위, 한계에 봉착
석유화학산업은 석유 정제를 기반으로 성장해왔다. 원유를 정제하면 LPG, 나프타, 등유, 경유 등 다양한 유분이 분리된다. 이 중 나프타는 나프타 분해설비(NCC)를 통해 에틸렌, 프로필렌, 부타디엔 등의 기초 유분으로 전환된다. 에틸렌은 플라스틱, 합성고무, 고기능성 화학소재 등 다양한 산업에 필수적인 기초 재료다. 폴리에틸렌(PE), 폴리프로필렌(PP) 같은 제품은 현대 생활에 필수적인 물품 제조의 중심에 있다.
한국 석유화학산업은 이러한 유분 생산과 활용을 통해 국가 경제 성장을 견인해왔다. 그러나 현재의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 이러한 위치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거세지는 중국과 중동의 물량공세
한국 석유화학산업은 나프타 분해설비(NCC)를 통해 연간 약 1,200만 톤의 에틸렌을 생산하고 있다. 이는 세계적인 규모로, 한국 경제 성장의 주요 원동력 중 하나였다. 그러나 글로벌 경쟁 환경은 급변했다.
중국은 2023년 약 5,200만 톤의 에틸렌을 생산하며 세계 1위 생산국으로 부상했다. 이는 한국의 연간 생산량의 약 5배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또한, 중동 지역에서는 2027년까지 총 8개의 정유·석화 통합공장(COTC)이 건설될 예정이며, 이들의 총 에틸렌 생산량은 약 1,123만 톤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의 연간 생산량을 초과하는 규모로, 글로벌 석유화학 시장에서의 공급 과잉을 초래하고 있다.
특히, 중동의 COTC 공장은 원유를 직접 에틸렌 등 기초유분으로 전환하는 공법을 통해 생산 단가를 크게 낮추고 있다. 일부 공장의 에틸렌 생산단가는 톤당 200달러 이하로, 이는 중국산보다 30% 이상 저렴한 수준이다. 이러한 가격 경쟁력은 한국 기업들에게 큰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과거 경제 호황을 예상하며 막대한 생산 설비를 증설했으나, 최근 경기 침체로 인해 제품 가격을 낮추는 밀어내기 전략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발 저가 공세는 한국 석유화학 기업들의 시장 점유율을 잠식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글로벌 석유화학산업은 심각한 공급 과잉에 직면했으며, 이는 가격 경쟁력을 기반으로 한 한국 석유화학산업에 치명적인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석유화학 산업 주가 곤두박질
석유화학산업의 위기는 기업 실적과 주가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롯데케미칼의 주가는 최고점 대비 약 60% 하락하며 시장의 불안감을 반영했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또한 각각 약 50%와 45% 이상의 하락세를 기록하며 산업 전반의 어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단순히 경기 순환적 요인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다. 전문가들은 석유화학산업이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혔으며, 이제는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분석한다.
최근 에쓰오일이 추진 중인 샤힌 프로젝트는 대주주인 중동의 아람코에 의존적인 구조를 벗어나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준다. 이 프로젝트는 아람코의 원유를 기반으로 한 정제능력을 확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경쟁력 향상보다는 단순히 하청 구조를 강화하는 데 그칠 가능성이 높다. 이는 한국 석유화학산업이 구조적으로 대외 의존성을 탈피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반영한다.
석유산업 체질변화로 출구전략 세워야
한국 석유화학산업은 기존의 나프타 기반 NCC 공정을 넘어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여야 한다. 바이오 플라스틱, 고기능성 소재와 같은 차별화된 제품은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는 주요 전략이다. 친환경 기술 도입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어야 하며, 순환경제와 연계된 케미컬 리사이클링, CCUS(Carbon Capture, Utilization, and Storage) 기술 활용은 필수적이다.
산업 체질 변화를 통해 새로운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한국 석유화학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의 입지를 점차 잃게 될 것이다. 변화와 혁신만이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미래를 보장할 것이다. 샤힌 프로젝트와 같은 사례는 한계를 보여주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산업 내 구조적 개혁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 석유화학산업은 미래를 위한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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