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최근 중국과 일본을 잇따라 방문하며 '현장 경영'을 재개했다. 언뜻 보면 코로나 이후 멈췄던 글로벌 출장의 재개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번 행보는 단순한 외유가 아니다. 초격차를 외치던 삼성이 이제는 연합과 생존을 택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전략 전환의 신호로 읽힌다.

중국에서 다시 손잡은 전기차 동맹
이 회장은 지난달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발전포럼에 참석했다. 포럼은 중국 국무원이 주관하는 최고위급 국제 경제행사로, 글로벌 기업들과 중국 정책당국 간의 의견을 나누는 자리다. 이 회장은 포럼 참석을 계기로 중국 2위 전기차업체 비야디(BYD) 회장을 만나 협력을 논의했고, 샤오미 본사도 방문했다. 특히 샤오미는 최근 전기차 시장에 진출했고, 이에 따라 반도체 및 배터리 수요가 급증하면서 삼성전자와의 협력 가능성이 주목된다.
중국 내에서 삼성전자의 입지는 과거에 비해 약화된 상태다. 한때 애플과 함께 프리미엄 시장의 양강 체제를 형성했지만, 현지 브랜드의 부상과 미중 갈등 여파로 점유율은 한 자릿수로 하락했다. 이번 이 회장의 방중은 잃어버린 중국 내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한 신호탄으로도 해석된다. 시진핑 주석은 이 회장을 외국 기업인 중 드물게 접견하며, 삼성의 중국 내 활동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를 취했다.

일본과의 소부장 복원, 실리 외교로
중국 일정이 끝나자 곧바로 일본 도쿄로 이동했다. 소니와 히타치 등 일본 기업들과 접촉하며 소재·부품 분야 협력 확대를 모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오테마치에 삼성전자 일본 법인의 새 사무소를 마련하며 경영 거점도 재정비했다. 삼성은 과거 일본의 디스플레이·센서·반도체 장비 업체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어왔으며, 특히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멀어진 양국 간 산업 협력 복원의 의미가 크다.
삼성은 니콘, 도쿄일렉트론, 스미토모화학 등과의 관계를 점진적으로 복원 중이다. 일본은 여전히 첨단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에서 글로벌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삼성의 기술 경쟁력은 이들과의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 여부에 따라 좌우된다. 이번 이 회장의 방일은 양국 산업 협력을 실질적으로 복원하고, 전략 물자 확보를 위한 조율 차원으로도 해석된다.

초격차 전략의 한계, 연합이 대안으로
이처럼 중국과 일본을 연쇄 방문한 배경에는 미국의 대중 견제 강화와 자국 우선주의 심화가 깔려 있다. 미국은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을 통해 한국 기업들에게도 미국 내 투자와 기술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지만, 미국 의회 내 불확실성과 수익성 확보 문제로 부담이 크다. 미국 상무부는 삼성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대신, 생산 수율과 매출, 기술 이전 내역 등 민감한 정보 공유를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한편 중국은 반도체 자립 가속화 정책 속에서도 한국 기업과의 기술 협력을 선호하는 분위기다. 특히 첨단 기술 차단에 나선 미국의 규제에 맞서기 위해, 중국 내에서 삼성과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일본은 한일 정상회담 이후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를 풀며 협력 복원에 나섰다. 이 회장이 양국을 연쇄 방문한 배경에는 이러한 '틈'을 파고드는 외교적 셈법이 깔려 있다.
삼성전자의 기존 전략은 '초격차'였다. 기술, 자본, 인재 면에서 경쟁사들을 압도하며 독자 노선을 걸어왔다. 하지만 글로벌 공급망 불안과 기술 패권 경쟁, AI와 전장이라는 신사업의 부상은 독주보다 연합의 필요성을 더 강조하고 있다. 특히 개발 주기가 짧고, 생산설비에 대한 투자비용이 급증하는 AI 반도체와 전장 부문에서는 단독 투자가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다.

기술 독주 아닌 조율, 글로벌 생태계 전환
또한 이 회장의 동선은 정치적 중립성과도 연관돼 있다. 미국의 대중 견제가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삼성은 노골적으로 한쪽을 택할 수 없는 위치다. 한국 정부가 미국 중심의 외교·경제 라인을 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삼성은 기업 차원에서 균형 외교를 실현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 지원을 조건으로 중국 내 생산능력 제한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는 삼성의 중국 시안 공장 운영과 직접 충돌할 수 있다.
미국과의 관계도 단절은 아니다. 삼성은 텍사스, 애리조나에 이어 미국 내 파운드리 확대를 추진하고 있으며, 인텔과의 경쟁도 병행한다. 다만 방향은 '독점'에서 '공존'으로 이동하고 있다. 기술 독주의 시대가 저물고, 선택적 협력의 시대로 전환되고 있는 셈이다.
삼성전자의 글로벌 전략은 독주가 아닌 조율로, 경쟁이 아닌 연합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AI, 전장, 바이오 등 미래 산업에서 기술력 하나만으로 버티기엔 리스크가 크다. 반도체 고도화, 차세대 패키징, AI 서버칩 등 모든 영역에서 생태계 중심 전략이 절실하다. 이 회장의 이번 동아시아 순방은 이를 보여주는 신호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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