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르네상스] <50> 작곡가 박시춘과 손목인
2025-04-24
민요조의 4행으로 구성된 김소월의 서정시는 강(江)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정한을 함축하고 있다. 강은 평화로운 자연 속에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살고 싶은 소망의 상징이다. 문학이 그러하듯 대중가요에서 강의 서사와 서정 또한 그렇지 못한 현실에서 우러나온 탄식과 눈물이었다.
일제의 탄압에 나라와 고향을 잃고 떠돌던 유랑민과 산업화 시대에 도시로 떠났거나 농어촌에 남았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강의 노래가 가슴에 스며들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말경에 나온 ‘눈물젖은 두만강’은 겨레의 호곡성이었다.
독립운동에 나섰던 남편을 잃어버리고 강변에서 밤새 통곡을 하던 여인의 애틋한 사연이 직접적인 창작의 배경이 되었던 ‘눈물 젖은 두만강’은 망국민의 위로가였다.
1960년대에는 KBS 라디오의 반공 드라마 ‘김삿갓 북한 방랑기’의 주제곡으로 연일 전파를 타면서 국민 애창곡이 되었다. 하지만 망국과 분단의 아픔이 여울져 흐르는 비애와 탄식의 정조에 숙연한 심사를 감출 길이 없다.
‘한많은 강가에 늘어진 버들가지는, 어제밤 이슬비에 목메어 우는구나, 떠나간 그 옛님은 언제나 오나, 기나긴 한강 줄기 변함없이 흐른다.’
한강(漢江)은 영욕의 우리 민족사를 송두리째 부둥켜안았던 강이다. 수난의 역사를 지켜온 시련의 강에서 민족의 중흥을 일으킨 기적의 강으로 겨레의 가슴 속을 관류해왔다. 심연옥이 피난 시절 대구에서 불러 히트한 ‘한강’도 6.25 전쟁의 비극적 산물이다.
전란으로 황폐한 강을 소환했지만, 늘어진 버들가지와 뱃사공의 옛노래를 등장시키며 상처투성이의 쓰라린 시절을 위로하고 있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 강변에서 자란 안도현 시인은 아버지가 흥얼거리던 ‘처녀 뱃사공’을 떠올리곤 했다. 데뷔작 ‘낙동강’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스스로를 ‘내성천의 물길을 따라 오르내리던 한 마리의 어린 물고기였다’고 했던 시인에게 강은 고향이고 그리움이었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며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처녀 뱃사공’은 6.25 전쟁으로 입대한 오빠를 대신해 노를 젓던 처녀 가장의 사연을 노래로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는 오빠에 대한 그리움과 고단한 삶의 무게는 전쟁에 휩쓸린 대중의 정서를 대변했다. 1950년대 후반 황정자가 불러 국민 애창곡이 되었다.
손인호가 부른 ‘한많은 대동강’은 전쟁과 분단으로 잃어버린 고향땅을 그리워하는 월남민들의 망향가이다. 남한의 한강에 상응하는 북한의 대동강은 북녘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에게는 고향의 상징이었다.
그 밖에도 강의 노래는 숱하다. 1970년대에 유행했던 강원도의 ‘소양강 처녀’, 서울로 간 님을 기다리는 전라도의 ‘영산강 처녀’ 등등. 강의 노래에는 곡절 많은 서민대중의 숨결이 녹아있다.
함경도 원산의 적전강변에서 자라 경상도 낙동강변에서 살다가 서울의 한강변에서 생을 마감한 구상 시인에게 강은 일생의 터전이면서 시적 사유를 견인한 문학적 이상향이자 정신적 구도의 공간이었다.
저무는 강가의 노을빛처럼 강을 꿈꾸며 살아온 우리도 그렇게 늙어갈 것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순리와 평화로 흘러가고 싶은 것이다. 오늘 우리가 강의 노래를 새삼 불러보는 까닭이다.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댓글
(0) 로그아웃